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강인한 것들

강인한 것들 권영상 점심으로 순대국을 먹고 나올 때다. 씨앗가게 앞을 지나던 아내가 길가에 내놓은 씨앗 자루 앞에 앉았다. 종자용 쪽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씨알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쪽파는 뭣 하러 심으려고!” 나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지난해 아내는, 친구한테 얻은 쪽파 한 봉지를 심어 재미 본 경험이 있다. 아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쪽파 자루 안의 쪽파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나도 손을 넣어 쪽파를 만져봤다. 서서 본 내 판단과 다름없이 쭉정이에 가까웠다. 알맹이가 있다면 끄트머리쯤에 조그마한 마디 하나가 만져질 뿐 속이 비어있었다. 다음에 사지 뭐, 그 말을 하려는데 아내가 주인에게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대신 많이 드릴 게요. 8천원이요.” 했다. ..

느티나무 숲길에 나와 서서

느티나무 숲길에 나와 서서 권영상 뜻밖에 첫눈이 내린다. 좀 전까지만 해도 하늘이 파랗고 해도 좋았는데, 마치 일기예보와 짜고 치듯 눈 내린다. 11월에 내리는 첫눈치고 예사 눈이 아니다. 나는 우산을 쓰고 아파트 후문을 나선다. 느티나무숲 느티나무들이 첫눈에 휩싸이고 있다. 눈은 오후 2시부터 내린다 했고, 적설량은 1센티미터라 했다. 그 말에 나는 ‘1센티나 내린대!’ 하며 코웃음 쳤다. 첫눈이 내리면 얼마나 내린다고 적설량 타령일까 했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나는 적잖이 놀란다. 느티나무 숲은 떨어진 느팃잎으로 수북하다. 그 위로 눈이 내린다. 눈 아래 잠들고 있는 낙엽들은 모두 지난봄과 여름과 가을이 만들어놓은 고단한 잔해들이다. 봄이 왔을 때 느티나무들은 숲을 연둣빛으로 환하게 만들었다...

수능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수능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권영상 목요일인 오늘, 수능일이다. 수능 수험생들이라면 지금쯤 수험장에서 문제 풀이에 몰두하고 있겠다. 이른 아침 집을 떠나와 제 시간에 도착한 학생들이 대부분이겠다. 그러나 멀쩡히 가던 길도 이런 날이면 버스를 잘못 타거나 역방향으로 전철을 타고 갈 때가 있다. 가다가 ‘어,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허겁지겁 전철을 바꾸어 타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온 학생도 있을 테다. 전철이나 버스를 바꾸어 타고 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시험 꽝이겠구나’, ‘대학은 내년에나 가자,’ 그러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긴장이 풀리는 자신을 비난했을지 모른다. 도대체, 꼭 이런 순간에 왜 이러는 거야! 하고. 어쨌든 지금쯤은 벌렁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평온한 마음을 되찾았기를 바란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지갑을 잃어버렸다 권영상 지갑을 잃어버렸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에야 알았다. 오후 2시쯤 가을 나들이 겸 차를 몰아 30분 거리에 있는 고찰에 갔었다. 지난해에도 갔었지만 그 절의 불타는 듯한 단풍과 잘 단장해 놓은 가을꽃 풍치가 그리웠다. 무엇보다 그 댁 부처님과 주렁주렁 달려 있을 감나무 감들이 눈에 선했다. 노란 은행나무 길 끝의 일주문을 들어서고, 천왕문을 들어서고, 가벼이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을 뵙고, 절마당 벤치에 앉아 이울어가는 가을 소풍을 즐겼다. 그때 가을꽃 곁에 앉아 꽃들과 놀았는데 그 사이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지갑이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절에다 지갑을 떨어뜨리고 온 것 같아.” 나는 결국 아내에게 그 말을 했다. “걱정 말어. 절에서 잃어버렸으니 부처님이 잘 돌보..

나는 가을을 사랑했다

나는 가을을 사랑했다 권영상 가을을 사랑했다. 그때 나는 중 2 였고, 첫사랑이었다. 우리가 만난 건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중2 때 병명도 모르는 상태로 병원에 장기 입원했다. 아무 문제없던 나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헝클어졌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시골이었고,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중심지에 있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저녁 무렵 4킬로미터가 넘는 집으로 혼자 돌아왔다. 내가 가을을 만난 건 그때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만난 적은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 스쳐지나가는 사이였다. 손을 잡거나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궁금함이 없었다. 그러나 엄마가 입원한 그때는 달랐다. 세상..

감잎 가을 선물

감잎 가을 선물 권영상 아내가 참여한 미술전이 끝났다. 작품을 회수해 온 아내가 선물이라며 전시작품 도록을 내밀었다. 전시장이 코앞인 데도 못 가봤다. 예상치 못한 독감에 걸렸다. 날마다 아침에는 8시에 산에 오르고, 밤에는 9시에 걷기 길에 올라 한 시간을 걷는다. 딴엔 그걸 커다란 운동이라 믿어선지 병원에 안 가고 지금 닷새를 버티고 있는 중이다. “잘 찾아봐. 당신에게 줄 가을 선물을 숨겨놨어!” 그제야 나는 책갈피에 삐죽 나온 가을 빛깔을 쏙 잡아당겼다. 빨갛게 익은 감잎 두 장이 나왔다. 순간 예술의 전당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들이 떠올랐고, 이 감잎은 그들의 가을 분신임을 알았다. 들여다 볼수록 가을이 곱다. 감잎을 만져보는 손끝이 촉촉하다. 가을물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감잎이 만들어내..

야! 무지개 떴다

야! 무지개 떴다 권영상 아침에 그친 비가 점심 무렵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엔 비가 좀 부족하다 해야 하는데 어찌된 건지 여름부터 비가 많다. 온다던 태풍이 오지 않았을 뿐, 가을비는 무더기비처럼 거세게 내린다. 날이 좀 들 것 같아 대파밭 북을 주고 돌아서면 놀리듯이 비가 내렸다. 고랑에서 긁어올린 흙 속 유기물을 비가 씻어내리는 것도 문제지만 비에 파밭골이 무너진 걸 보면 남루하다. 주인 없는 밭 같아 비가 뜸하면 또 비 올 줄 알면서도 파밭의 북을 준다. 오후 늦게 비가 뜸하자, 나는 괭이를 들고 또 파밭에 들어섰다. 파밭이래 봐야 모두 여섯 골. 김장 파 넉넉히 드리겠다고 벌써 여기저기에 말해 뒀다. 지난해는 파 농사가 잘 돼 파를 나누어 드리는 내 마음이 뿌듯했다. 물론 그때에도 나는‘내..

가을이 익고 있다

가을이 익고 있다 권영상 서울행 버스정류장에 아내를 내려주고, 나는 마트 앞에 차를 댔다. 식품 몇 가지를 사 가지고 차에 오르려다 다시 내렸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 아쉬웠다. 차를 두고, 가까이에 있는 개울을 향했다. 청미천이다. 개울 안에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있다. 징검다리처럼 나트막하다. 노란 갈볕을 받으며 그 다리를 건너고 싶었다. 천변 양켠에 무성하게 자란 갈숲. 갈숲 안쪽에 펀하게 개울물이 흐른다. 다리를 건넌다. 그제야 못 듣던 개울물 소리가 철철철 요란하다. 발을 멈춘다. 물소리를 듣는다. 머릿속이 물소리처럼 철철철 살아나는 느낌이다. 웬만한 개울에서 들을 수 없는 큰 물소리다.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가을볕이 쏟아져 반짝인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개울바닥이 온통 굵은 ..

한가위 추석 잘 쇠세요

한가위 추석, 잘 쇠세요 누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해마다 한가위 추석이 슬며시 오네요. 누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하늘은 커다란 달덩이를 선물처럼 보내오고요. 누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대추나무는 대추를 붉게 익혀 놓고 토란은 토란국 먹기 좋게 살을 찌웠네요. 누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세월은 내 얼굴 위에 주름살 하나 슬며시 올려놓았군요. 누가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가을은 노란 볕을 부어내리시고 파란 가을을 저렇게 높은 하늘에 펼쳐 놓았네요. 세월은 가고 오는 것 누군가에게 감사합니다. 그 말을 해야할 때가 왔습니다.

버리고 싶은 이름

버리고 싶은 이름들 권영상 짬 좀 내어 논벌에 나가 봐야지, 했는데 여태껏 그 일을 못했다.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벼가 익는 논벌이다. 그런데도 뭐가 바쁜지 내일, 내일, 하다가 오늘에야 틈을 냈다. 요기 대여섯 집을 지나면 언덕이 나오고 언덕을 넘으면 논벌인 벽장골이 펼쳐진다. 신발 끈을 조일 겸 따가운 가을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들어섰다. 거기 앉아 풀린 운동화를 조이고 일어서며 보니 나를 가려준 나무가 뽕나무다. 논벌을 내다보는 밭둑에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 가끔 이 길을 지나다녔지만 여기에 뽕나무가 서 있는 줄은 몰랐다. 괜히 뽕나무를 한 바퀴 빙 돌아본다. 예전 딸아이가 어렸을 때다. 나무만 보면 아빠랍시고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던 때가 있었다. 밭 가생이에 선 뽕나무를 보자, 이게 뽕나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