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게임은 길고 힘들었다
권영상
연말 모임 시즌이다.
나는 벌써 몇 번의 연말 모임을 가졌다. 그러고도 몇 번의 모임이 더 남았다. 모임이라 해 봐야 주로 식사 모임이며, 아쉽게 흘러가는 시간에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는 정도이다.
여러 번의 모임 중에서도 모 초등학교 체육관에서 가진 모임은 좀 특별하다. 주최측에서 딱 서른 명만 초대했다. 모여 술을 마시느니 재미난 게임으로 한 해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자는 취지였다.
간단한 의식이 끝나자, 게임을 지도해 주실 분을 소개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서른 개의 의자에 앉은 우리를 그대로 15명씩 홍팀과 청팀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몸에 큰 무리가 가지 않는 초등학생 수준의 게임을 시작했다.
처음 게임은 동그란 색판을 뒤집는 게임이었고, 두 번째는 상대편 코트에 콩주머니를 많이 던지는 게임이었다. 그게 끝나자 2인 1조의 주사위 던지기라는 달리기 게임을 내놓았고, 마지막 게임은 줄다리기였다.
줄다리기는 독특하고 재미난 경기였다. 예전의 줄다리기가 동아줄을 잡고 마주 서서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줄을 당기는 단체 게임이었다면 이건 제법 현대화된, 머리를 좀 써야하는 줄다리기였다.
게임을 이렇다. 중앙선을 가로질러 작은 동아줄 다섯 개를 나란히 펼쳐놓는다. 그리고 중앙선에 가림막을 세워 상대 코트를 넘겨다보지 못하게 한다. 각 팀 15명은 동아줄마다 인원수를 0명에서 3,4명으로 전략적으로 배정한다. 확실히 이기기 위해선 한 줄에 0명을 배치하고 다른 줄에 여러 명의 힘을 모아주면 전체 승률을 높일 수 있는 게임이다. 일종의 트릭을 쓰는 경기로 힘만으로 이기는 과거의 줄다리기와 다르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인원 배정이 끝나면 가림막을 내린다. 그때 이미 승부의 반은 결정된다. 물론 인원이 비슷하게 배정된 줄에서는 팽팽한 힘겨루기가 있게 된다. 힘을 합쳐 당기느라 소리 지르고, 응원도 할 수 있는 과거의 줄다리기 방식이 남아있는 게임이다.
줄다리기도 끝나고, 저녁 식사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다. 머릿속에 자꾸 맴도는 게임이 있었다. 앉은걸음으로 여기 저기 이동하며 빠르게 색판을 뒤집던 경기다.
나는 청팀이라 빨간 색판을 부지런히 파란 면으로 뒤집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상대편의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오며 내가 뒤집어 놓은 파란색 면을 빨간 면으로 뒤집고 있었다. 물론 나 또한 내 앞의 누군가가 뒤집어 놓은 색판을 파란 색으로 뒤집었던 것이다. 코트 안에 들어간 서른 명은 30초 동안 누군가의 과업을 빠르고 잰 손으로 뒤집었다.
뒤집혀가는 색판을 보며 우리는 모두 우리의 성취가 재빠르게 부정되고 있음을 알았다. 잠시지만 약간의 허탈감이 왔다.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의 공들인 과업을 뒤집거나 털어 먼지내거나 허물어버리거나 매몰찬 말로 깎아내리며 마치 그게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게임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쉬지 않고 상대팀의 색판을 뒤집었다. 30초였지만 그 게임은 길고 힘들었다. 30초가 타인의 행위를 끊임없이 부정해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기거나 져주는 일은 즐거울 수 있지만 누군가의 과업을 뒤쫓아 가며 뒤집는 일은 그게 게임이라 해도 고통스럽다.
눈을 감고 지나온 나의 인생을 돌아다 본다.
<교차로신문> 2024년 1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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