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샹그릴라
권영상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우리에게 언제쯤 마주할 기회가 주어질까. 그때까지 건강에 유의하기 바라네.’
보내준 노래 잘 들었다며 곡조도 좋지만 가사도 좋다고. 추워지는데 잘 지내라고 보낸 내 문자 메시지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5년 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 후 탈 없이 조심조심 지냈으니, 어느 정도 안심해도 좋은 때에 와 있다. 그는 고등학교 친구다. 그도 나처럼 남들보다 두어 살 많은 나이에 다녔으니, 어쩌면 그런 사정으로 서로의 마음이 깊이 닿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뿐. 졸업과 동시에 나는 그 시절의 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그 후, 오래 다니던 직장도 물러났다. 그러고도 오랜 시간이 더 흐른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에게서 문득 전화가 왔다. 그때가 그가 수술로 병상에 누워있던 때였다. 내가 몹시 생각나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알았다는 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를 보러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가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였다. 그도 나도 목소리만으로 족해야 했다.
통화가 끝나고, 그는 벚꽃 핀 교정에서 나와 둘이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을 sns로 보내 왔다. 그는 그 시절의 추억을 이 위태로운 병상으로까지 가져온 모양이었다.
그 얼마 뒤 퇴원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는 강원도, 나로서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태백에 살고 있었다. 몸이 조금씩 나아지면서 그도 사지에서 돌아온 사내들처럼 마음 비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해 오던 대로 이웃사람들을 위한 잔일 봉사도 하며 나름대로 투병을 잘 해 나갔다.
생각해 보면 이 나이에 암으로부터의 귀환은 축복이었다.
만나지는 못 해도 나는 그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었다. 어느 여름철인가 그는 나더러 한번 다녀가 달라고 종용했다. 태백이라는 곳이 얼마나 고지대인지 경험해 보라는 거였다.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자야하는 곳이라 했다.
그렇지만 일상에 매여 사는 내가 여기서 먼 그곳까지 달려갈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으론 일을 하다가도, 또는 밤에 잠자리에 들다가도 그를 생각하곤 한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 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잔다는 그 멀고 먼, 그리고 아득히 구름에 닿을락말락한다는 그 높은 땅 태백을 떠올린다. 제주도나 해외에 나가 잠깐씩 머물던 곳을 떠올릴 때도 있지만 그곳은 내가 가 본 곳이다. 그러나 그가 사는 태백은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요원한 미지의 땅이다.
그를 알고부터 내 생각은 가끔 그가 산다는 태백으로 날아간다.
그곳은 너무나 멀고 아득하고 골짝이 깊고 산이 높은 곳이다. 마치 문학작품 속의 어느 한 곳 같은, 아니 한번 가보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마치 메타버스나 가상의 세계 같은, 때로는 죽음 앞에서도 자연스럽게 되살아나는 밤별 같은 곳이다.
전화 속 너머에서 그는 가끔 말한다.
“겨울엔 밤이 길어 꿈이 많아지는 곳이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가 사는 곳은 이쪽과 너무도 다른 내 마음의 샹그릴라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상은 때로 나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딘가에 여기와는 사뭇 다른 곳이 있다는 상상은 아름답다. 아득한 그곳엔 옛시절의 추억을 간직한 내 친구 그가 있다. 그가 산다는 태백을 내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싶다.
<교차로신문> 2024년 12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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