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새로 구입하다
권영상
“선생님, 줌 회의 들어가기 전에 잠깐 인사 말씀 좀 해 주세요.”
담당자가 회의 하루 전에 내게 부탁을 했다.
나는 선뜻 대답하고 짤막한 인사이긴 해도 할 말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 날 2시간 전. ‘오후 7시 회의니까 10분 전에 들어와 주세요.’라는 문자가 왔다.
내 탁상시계가 회의 시작 15분 전을 가리킬 때다. 나는 담당자의 요구대로 10분 전에 들어가기 위해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 물병에서 물 한 컵을 따라 들고 들어오며 얼핏 거실 벽시계를 봤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시계는 7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랴부랴 내 방으로 들어와 다시 탁상시계를 봤다. 10분전이 되려면 아직 4,5분은 더 있어야 했다. 휴대폰을 켰다. 머리가 아뜩해졌다. 회의 시간은 이미 6분이나 지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낭패가 있다니!
그 동안 탁상시계가 십여 분이나 늦게 가는 걸 모르고 살았던 거다. 모임에 나갈 때도 나는 이 탁상시계의 시간으로 움직였다. 도착이 늦으면 전철이 제때 안 와 그렇겠거니 했다.
결국 그날 나는 줌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다. 아무리 작은 회의라도 회의엔 다 순서가 있는 법인데, 첫인사를 해야할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으니 담당자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내가 너를 너무 믿었구나!’
탁상시계를 탓했지만 이미 늦었다.
탁상시계는 그날 밤, 밧테리가 넉넉한 데도 영영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와의 인연은 이렇게 끝났다. 아쉬웠다. 탁상시계는 딸아이 첫돌에 직장 동료들이 주고 간 선물이다. 그러니 36년을 내 방에서 나와 함께 한 반려자나 다름없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틀리는 시계를 옆에 두고 살 수는 없었다.
시계를 사러 시계가게를 찾아갔다. 내 책상 크기와 모양에 맞는 사각 탁상시계를 찾았다. 둥근 형태의 발이 달린 시계는 많아도 지금 내 책상에 놓인 열주식의 멋스런 시계는 없었다.
나는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을 바꾸었다. 되든 안 되든 시계를 수리해 보기로 했다.
버리기 망설여졌다. 오랫동안 정이 들었다. 때로는 밤이 이슥할 때까지 나와 함께 고단한 밤의 강물을 건넜고, 원고 마감일로 시간이 촉박할 때면 그 임박한 시간을 시계는 나와 함께 했다. 옛 벗을 잃기 아쉽듯이 탁상시계와의 작별도 아쉬웠다.
시간을 내어 내가 알고 있는 좀 먼 시계가게를 찾아갔다.
연세가 많은 가게 주인은 내가 가져간 시계를 찬찬히 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시는 가격보다 수리비가 더 들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수리할 수 있다는 말에 나는 반갑게 시계를 맡겼다. 아니 내 과거를 맡겼다. 아니 영원히 사라지고 말 뻔 한 내 삶의 역정을 맡겼다. 수리비가 더 든다 해도 그게 우리가 함께 해온 소중한 과거의 흔적만큼이야 할까 싶었다.
그리고 닷새 뒤 시계를 찾으러 갔다. 수리해놓은 시계는 딸아이의 첫돌 그때처럼 반짝였다.
“시간도 새 시간으로 넉넉하게 넣어드렸습니다. 근간에 나온 독일제품 시간입니다.”
내 마음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시계가게 주인이 웃어보였다.
며칠 있으면 새해다.
시계 가게 주인께서 넉넉히 넣어주신 신제품 시간으로 새해를 산뜻하게 맞이하고 싶다. 그때에는 탁상시계의 시간을 사랑해야겠다.
<교차로신문> 2024년 1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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