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8

비 내리는 날의 풍경

비 내리는 날의 풍경 권영상 창밖에 비 내린다. 장맛비다. 빗소리가 아파트 마당을 꽉 채운다. 빗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어설 자리 없이 오후가 요란하다. 창가에 서서 그 먹먹한 비를 내다본다. 아파트 마당가에 둘러선 모과나무, 감나무, 느티나무 가지들이 활처럼 휘었다. 나는 우산을 펼쳐들고 길에 나섰다. 오늘 같이 비 내리는 날 찾아가 볼 데가 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갤러리다. 갑갑한 생각을 뒤집어 보려고 가끔 찾아갔었다. 아니 더욱 솔직하게는 그림에 대한 감수성을 잃을까봐 찾아가곤 했다. 비는 갈수록 거칠어진다. 방향을 잃은 짐승처럼 휘몰아친다. 비는 신발이며 바짓가랑이를 적시더니 어깨며 등까지 집어삼킨다. 우산대를 잡고 비에 맞서는 일은 즐겁다. 요 근래 이렇게 쏟아지는 폭우는 처..

사람과 친근한 꽃들

사람과 친근한 꽃들 권영상 누가 돌보지 않는데도 뜰안에 봉숭아꽃이 핀다. 짓궂게 비 오는 여름날, 그 많은 비를 다 맞으며 피는 봉숭아꽃을 물끄러미 건너다본다. 다소곳하고 좀은 수줍어하는 꽃이다. 내색하지 않는, 보아야 보이는 꽃이다. 무성한 잎 아래 보일 듯 말 듯 꽃을 숨기고 있다. 궂은비에 꽃이 젖을까봐 잎으로 감싸는 모성애가 고요히 느껴진다. 언젠가 아주 오래 전에 씨앗 몇 개를 얻어다 심었던 것이 저 홀로 어찌어찌 가까운 자리를 소리 없이 옮겨 다니며 핀다.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꽃이다. 그렇게 어느 한켠에 부끄러이 머물다가, 어느 때에 잠깐 사람의 눈길 안에 들어왔다가 고대 잊혀지고 만다. 우리 곁에 다가와도 선뜻 보지 못하고, 떠나갔대도 그가 있던 자리에 표가 나지 않는 꽃이다. 봉숭아가 고..

호박과 코 베 갈 추위

호박과 코 베 갈 추위 권영상 올겨울은 제법이다. 겨울 구실을 좀 한다. 겨울 예고편도 없이 곧장 기온을 뚝 떨어뜨리고, 사흘이 멀다 하고 눈발을 날린다. 치고 드는 품이 어디서 많이 본 솜씨다. 연일 영하의 강추위를 예고한다. 지금대로라면 겨울 맛을 제대로 볼 것 같다. 겨울이 깊어가는 시절에 좋은 음식이 있다. 호박죽이다. 방금 끓인 호박죽을 후후 불어 먹는 맛은 일품이다. 오랫동안 호박은 주로 대형마트에서 구했다. 그러던 것이 끝내 안성 텃밭 한 귀퉁이에 호박 심을 자리를 지난해에 마련했다. 예전 아버지하시던 걸 보면 4월쯤 남녁 담장 밑에 호박 구덩이를 한껏 파시고 거기에 잘 삭힌 뒷거름을 가득 채우셨다. 그렇게 땅을 살찌운 뒤 호박씨를 넣고 봉분처럼 둥글게 흙을 덮으셨다. 그러고 한 보름 지나면..

가을볕에 이불 널기

가을볕에 이불 널기 권영상 여름 장마는 가혹했다. 50일이 넘도록 우리들의 터럭만한 관용과 인내심에 흠집을 냈다. 비에 시달리고 코로나에 시달리느라 여름이 가도 가는 줄 몰랐다. 그야말로 자고나 보니 줄창 비를 뿌려대던 여름은 못난 사내처럼 훌쩍 가버렸다. 장맛비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곰팡이 냄새. 안성에 내려와 이 방 저 방 방문을 열면 그 때마다 방에서 곰팡이 내가 났다. “모처럼 날 좋은 데 빨래를 해야겠어!” 쏘는 볕을 내다보고 있던 아내가 볕이 아까운지 일어섰다. 장맛비 끝의 해는 유난히 따갑다. 볕에서 바삭바삭한 비스킷 냄새가 난다. 슬쩍슬쩍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한 가을 기운이 감돈다. 아내가 빨래를 하는 사이, 나는 데크 난간을 닦고 이불장의 이불을 모두 꺼내어 볕에 넌다. 가끔씩 내려와 며..

가을을 부르는 코스모스

가을을 부르는 코스모스 권영상 올 여름에 대한 기억이라곤 장맛비 말고는 없다. 억수같은 비로 시작해 억수같은 비로 막을 내렸다. 비의 입장에서 본다면 열연이다. 그러나 수모를 당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참혹한 결말이다. 텃밭은 미처 물이 빠져나가지 못해 몇 날 동안 물에 잠겼고, 뜰앞 나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비의 무게에 모질게 시달렸다. 뜰앞 꽃복숭아나무가 걱정이었는데, 결국 선 채로 반쯤 기우뚱해졌다. 지난 4월, 그가 피운 백설도화는 마을사람들의 입을 탔다. 그 꽃복숭아나무가 뜰을 건너오는 잔인한 비바람에 힘을 잃자, 부랴부랴 버팀목을 해주었다.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홈통이 막혀 추녀끝 빗물받이가 빗물로 넘쳐났다. 우중에 차를 몰고 읍내에 나가 사다리를 구해 지붕에 올라가 봤다. 역시나였다. 까마중이 ..

장맛비를 기다리는 이들

장맛비를 기다리는 이들 권영상 장마철이다. 해가 나면 폭염이 걱정이고 장마가 지면 줄기차게 내리는 장맛비가 걱정이다. 장맛비 때문에 새로운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대추나무다. 나무시장에서 큼직한 대추나무를 사다가 심은 지 3년.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대추나무쯤이야 그냥 심어두면 대추가 열리는 줄 알았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대추나무 전지법을 배웠다. 그대로 전지를 한 탓일까. 대추 열매가 오종종하게 열렸다. 물론 볕도 좋았고, 비도 알맞추어 왔다. “대추 한 가마는 따겠구나!” 나는 대추나무에게 실없는 농을 했다. 근데 하늘이 내 농을 들었을까. 시샘하는 게 분명했다. 좀만 비 내려도 대추나무가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더니 끝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우듬지 쪽 새 가지들이 성하긴 너무 성했다. 비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