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날의 풍경
권영상
창밖에 비 내린다. 장맛비다. 빗소리가 아파트 마당을 꽉 채운다. 빗소리 외에 다른 소리가 들어설 자리 없이 오후가 요란하다. 창가에 서서 그 먹먹한 비를 내다본다. 아파트 마당가에 둘러선 모과나무, 감나무, 느티나무 가지들이 활처럼 휘었다.
나는 우산을 펼쳐들고 길에 나섰다. 오늘 같이 비 내리는 날 찾아가 볼 데가 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갤러리다. 갑갑한 생각을 뒤집어 보려고 가끔 찾아갔었다. 아니 더욱 솔직하게는 그림에 대한 감수성을 잃을까봐 찾아가곤 했다.
비는 갈수록 거칠어진다.
방향을 잃은 짐승처럼 휘몰아친다. 비는 신발이며 바짓가랑이를 적시더니 어깨며 등까지 집어삼킨다. 우산대를 잡고 비에 맞서는 일은 즐겁다. 요 근래 이렇게 쏟아지는 폭우는 처음이다. 금방이라도 무슨 난리가 날 것 같다. 우산으로 거친 비바람을 밀고 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본다. 벌써 등이 다 젖었다.
쓰나마나한 우산을 들고 가는 내가 궁금하다. 이런 몰골로 갤러리에 들어서서 사람들 시선을 어떻게 감당하려는 건지. 빗물에 쿨럭거리는 신발 소리, 바닥에 흔적을 남기는 물 자국, 다리에 착 달라붙은 바지, 헝클어진 머리칼.
나는 그러고도 빗길 끝에서 갤러리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늘 같은 날 준비했을 우산꽂이대가 없다, 회랑의 불조차 꺼져 있다. 전시실 두 개가 열린 채 어두컴컴하다. 텅 비어있다. 다음 전시 예고만 덩그러니 벽에 붙어 있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론 다행이지 싶었다.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갤러리 바깥에 놓인 긴 등의자가 보였다. 옷도 말리고 다리도 쉴 겸 바깥으로 나가 비를 향하여 난 처마 밑 등의자에 앉았다. 안전하다. 나는 편하게 등받이에 등을 댄다. 비는 갤러리의 열린 마당 위로 억수같이 내린다.
아, 이래서 비 내리는 날이 좋을 수 있구나, 오그라들었던 마음이 갑자기 펴진다.
대낮에 퍼붓는 비는 마음을 좀 눅진하게 한다. 번들거리는 폭염 속 풍경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푹푹 찌는 지친 풍경이 아니다. 빛바랜 낡은 모습도 아니다. 물론 매양 반복적으로 인간을 길들이는 그 뻔한 일상의 모습도 아니다.
비는 거친 소리와 다르게 사위를 차분하게 만든다. 같은 빌딩 같은 나무인데도 빗물에 젖은 모습들이 도닥도닥 힘든 마음을 위로한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고 싶어 한다.
저쪽 음식점 골목 담장에 한 무더기 능소화 꽃이 폈다. 그러고 보니 능소화는 장맛비 내리는 여름철에 핀다. 능소화 꽃을 보고 있으려니 청계산 어느 국수집 길 건너에 피던 커다란 모감주나무가 떠오른다. 모감주나무도 장마가 질 때면 ‘golden rain tree’라는 이름답게 비 맞으며 노랗게 꽃 핀다. 모두 비를 즐기는 나무들이다.
가끔씩 해바라기 같은 우산을 든 사람들이 능소화가 핀 골목길로 들어서거나 거기서 나온다. 한사람 또는 두어 사람씩 우산 속에 머리를 숨기고 드나든다. 능소화 역시 밝고 환한 대낮보다 장맛비 주룩주룩 내리는 날의 비에 젖은 모습이 더욱 곱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어 보인다.
등의자에 비스듬히 혼자 앉아 비 내리는 거리의 풍경을 마치 액자 속 그림을 감상하듯 바라본다. 빗금을 긋듯 날아가는 비며 바람이며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빗소리, 가끔 우산을 쓰고 가는 이들의 풍경이 즐겁다면 즐겁다.
내일까지 더 내릴 모양이다. 꼼짝 않던 몸을 움씰한다. 신발이며 바지에 밴 물기가 어지간히 빠졌다. 일어나 우산을 펼친다. 비 내리는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교차로신문> 2023년 7월 6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 내리는 날의 산행 (0) | 2023.07.13 |
---|---|
점심에는 감자를 먹다 (0) | 2023.07.05 |
기다림이 끝나는 신호 (0) | 2023.06.18 |
기도하건대 하늘의 도움으로 부디 (2) | 2023.06.13 |
탁상시계 (1) | 2023.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