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점심에는 감자를 먹다

권영상 2023. 7. 5. 10:52

 

점심에는 감자를 먹다

권영상

 

 

비가 뜸한 사이로 감자 한 이랑을 캤다.

그중에 몇 알을 골라 점심엔 감자를 먹기로 했다. 감자를 씻으러 수돗가에 나가는 사이, 그새를 못 참고 비 온다. 굵은 비다. 수돗물을 틀어놓고 안에 들어가 우산을 쓰고 나왔다.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이 검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수돗가 머위 밭에 여태 눈에 들어오지 않던 봉숭아꽃이 비 맞으며 핀다. 지난해 피는 걸 그냥 두었더니 익은 꽃씨가 화살처럼 튕겨져 나가 여기저기 올라왔다. 머위가 성장을 멈추는 사이 봉숭아가 훤칠하게 컸고, 꽃도 가득 피웠다. 분홍이다. 추억이 많은 꽃이라 그런지 볼수록 참하다. 그리고 볼수록 정이 간다.

 

 

턱과 어깨 사이에 우산을 끼고 앉아 감자를 씻는다. 금방 캔 햇감자라 손만 대어도 껍질이 벗겨진다. 뽀독뽀독 씻은 하얀 감자를 물그릇에 담가 놓고 수도꼭지를 잠근다. 감자는 언제 먹어도 좋지만 비 오는 날 점심으로 제격이다.

나온 김에 씻은 감자를 두고 텃밭 가장자리에서 피는 채송화 꽃을 보러 나선다. 채송화는 비를 맞으며 어떻게 피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텃밭 가장자리를 따라 피던 채송화가 올여름에도 잊지 않고 살아났다.

 

 

몇 해 전이다.

고향 친구 집을 찾아가 한바탕 놀란 적이 있다.

친구네 시골 마당이 온통 채송화 꽃밭이었다. 농가의 마당은 농사일로 대개 넓다. 근데 요즘은 논밭에서 콤바인으로 탈곡하다 보니 넓은 마당이 별 소용이 없다는 거다. 채송화 꽃씨를 뿌려 키운 친구의 여름마당은 빨강 노랑 하양 분홍 꽃으로 눈이 어릴 지경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날 보고 친구 역시 들떠있었다.자신도 채송화꽃 핀 마당을 내다볼 때면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이라 했다. 뜰아래 낙숫물 지는 곳에서부터 담장가 파초가 크는 곳까지 가득 피는 꽃을 바라보며 농촌이 이렇게 변해 가고 있구나! 했었다.

 

 

그때 받아온 채송화 씨를 이른 봄 온상에서 키워 텃밭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모종을 냈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 이듬해부터 밭으로 슬금슬금 들어선 채송화는 거름 기운 탓인지 엄청나게 세력을 키워나갔다. 아침 9시쯤 피어나 오후 2시까지 눈이 부시도록 핀다.

봉숭아꽃, 호박꽃, 달개비꽃은 나의 개인적인 경험 탓일까.

볕 좋은 한낮보다는 여름비 내리는 날에 보는 게 더 좋다. 장맛비를 피해 담장 위 호박꽃 속으로 찾아들어가는 호박벌은 운치 있다. 풀숲에 피던 달개비 파란 꽃에서 떠나간 사랑을 느낄 때도 여름비가 왔다. 뒤란에서 누나가 봉숭아 꽃잎을 따다가 싫다는 내 손톱에 물 들여 주던 그 날 그 기억도 한가히 여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우산 위에 떨어지는 비를 받쳐 들고 채송화 피는 밭 언저리로 간다. 고향 친구네 마당에서 보던 그 채송화 꽃만은 못해도 꽃은 비에 젖어도 예쁘다.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열고 채송화 꽃을 욕심껏 찍는다.

길고 긴 여름장마에도 꽃은 핀다. 생각해 보면 이 지상에 꽃피지 않는 날이란 없다. 해바라기며 수국은 물론 오이꽃, 개망초, 고마리, 지칭개, 까마중이꽃…….

 

 

전기밥솥에 통감자를 넣고 취사 버튼을 누른다. 아내가 넣어 보낸 명이나물 반찬이며 냉장고에 보관중인 무 김장 김치통을 꺼낸다. 감자로 점심을 때우고 옷장 정리를 해야겠다. 조금만 누기가 있어도 옷에 곰팡이가 피는 게 또 여름이다.

 

<교차로 신문> 2023년 7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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