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9

나는 얼마짜리 인생인가

나는 얼마짜리 인생인가권영상 아침마다 옷장문을 열면 망설여진다.옷장 안에 옷은 가득 차 있는데 마땅히 입을 옷이 없다.‘오늘 또 뭘 입지?’그러며 이것저것 뒤적이다 엊그제 입고 출근했던 옷을 또 꺼낸다. 아침마다 옷장 앞에 서서 머리 쓰는 시간만큼 성가신 게 없다.“백화점 세일 기간이니 봄옷 좀 보러 가.”토요일, 집에 오니 나보다 먼저 퇴근한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옷장 앞에서 우물쭈물하던 내가 딱했던 모양이다. 백화점 가는 거 싫다는 내 말에도 아내는 이미 나를 데려 가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그간 딸아이 뒷바라지 때문에 옷 한 벌 변변히 갖추어 입지 못한 건 나보다 아내다. 아내가 고생하고 있으니 아내에게 옷이라도 하나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더는 버티지 않고 따라나섰다. 아내 말대로 우선..

민낯을 사랑하는 일

* 고등학교 교과서 수록 지학사 2025 *2015년 11월 10일 '권영상 시인의 오동나무집'에 실린 글임  민낯을 사랑하는 일권영상  “결혼하면 어때?”컴퓨터 속 사만다가 물었다.“누군가의 삶을 공유한다는 기분은 괜찮아.”영화 속 주인공이며, 남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는 대필 작가 테오도르의 대답이다. 테오도르는 누군가의 사랑을 공유하고 그 공유한 감정을 글로 전해주는 일을 하지만 정작 자신은 결혼을 하였음에도 외롭고 쓸쓸하다. 그가 어느 날 돈을 지불하고 컴퓨터에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깐다. 그 프로그램에 나타난 인물이 바로 사만다, 스칼렛 요한슨이다.   “나는 좀 부족해도 괜찮아. 내가 아닌 누구인 척 살지는 않을래. 그렇게 되면 적어도 쓸쓸해지지 않을 테니까.”인공지능 사만다는 인간 테오도르를..

신라의 독특한 스토리 텔링

신라의  독특한 스토리 텔링권영상  1.황룡사에 대한 기록은 이렇다.14년 봄 2월, 임금이 유사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어 사찰로 고쳐 짓고 황룡이라는 이름을 내렸다.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4년의 일이다.이걸 좀 더 덧붙이면 용궁의 동쪽에 명활산이, 서쪽에 선도산, 북쪽에 금강산, 남쪽에 남산. 이 네 산의 정상에서 서로 마주 바라보이는 교차점에 궁궐터를 잡았다. 그런데 그곳은 궁궐을 짓기에 알맞았으나 하필이면 늪이었다. 늪을 메우기 위해 흙을 퍼 나르고 바위를 굴려 넣던 중에 천둥 치고 비 내리던 어느 날, 늪에서 황룡이 나타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걸 괴이하게 여긴 왕이 궁궐 짓는 일을 포기하고 절을 지었..

새별오름, 이보다 멋진 풍경

새별오름, 이보다 멋진 풍경권영상  오늘이 제주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송악산과 대정 오일장을 둘러보고 제주공항으로 가는 길에 곶자왈 도립공원과 새별오름을 들르기로 했다. 좀 무리지 싶었다.웬걸, 아침에 차로 이동하면서 삼방산에서 송악산까지 걸어가기로 한 사계 해안 길을 포기했다. 어제 카멜리아힐의 동백꽃 길을 너무 많이 걸은 탓이다. 사계 해변 대신 송악산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잠깐 송악산을 걸어 오르기로 했다. 절벽에 일제가 남겨놓은 해안 진지와 산기슭 진지를 만났다. 해가 들지 않는 북향 탓인지 절벽에 남아있는 상처들이 음울해 보였다. 우리는 역사의 아픈 흔적을 한번 들여다보는 것으로 뒷사람의 소임을 다한 것인 양 부끄러움 없이 돌아내려 왔다.  차를 몰아 모슬포항을 바라보며 대정 오일장에 들렀다...

11월의 폭설

11월의 폭설권영상   간밤에 아내를 서울로 보내놓고 잠을 설쳤는데 자고나니 뜻밖에 눈이 오네요.세상에! 아직 11월인데, 11월의 첫눈치고 느닷없이 왔고, 그 양도 많네요. 나는 창문을 열어놓고 우두커니 눈을 내다봅니다.길 건너 고추밭이며 마을 집들, 한때 무성하던 나무들이 이미 눈 속에 다 묻혀버렸네요. 데크에 쌓인 눈을 보아하니 10여 센티는 될 것 같습니다.아직 설레는 마음이 있어 휴대폰 카메라로 눈 풍경을 찍어 아내에게 보내고, 지인들에게 선물인양 보냈지요. 달려간 카톡은 이내 기쁘게 돌아왔죠. 그쪽에도 지금 한창 눈이 내린다는 소식입니다.  아침을 먹고 다시 창문을 여니 상황이 돌변했습니다.치고 들어온 눈이 친 만큼 또 쌓였습니다. 펄펄이 아니라 펑펑입니다. 하늘이 점점 검어지며 침묵이 깊습니..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권영상  마당에 길고양이가 눈 똥을 치우고 있는데 어휴, 하며 옆집 수원아저씨가 뭘 한 상자 들고 오신다."안녕하세요? 뭘 이렇게 안고 오세요?"추석 명절 쇠고 수원 아저씨를 오는 처음 뵙는다.우리는 명절이 가까이 오면 그 전에 명절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아왔다.그러고 오늘 처음 안성으로 내려왔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라 명절을 깨끗이 잊고 내려왔는데 수원 아저씨는 그 동안 내게 뭘 더 주실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드리고 싶어서요.”데크 난간에 들고온 상자를 어휴, 하며 올려놓았다.봉지째 따오신 포도다.“예. 포도 좀 하고요. 산책하며 주운 밤 좀 하고, 포도밭에 심은 땅콩. 요 얌전한 봉지 속이 궁금하시죠? 짧은 제 실력으로 키운 배 두 알이에요.”수원 아저씨..

풀독이 오르다

풀독이 오르다권영상   팔과 발목 부위가 빨갛게 붓는다.모기에 물린 자국처럼 몹시 가렵다. 풀독이다. 처음엔 이게 모기에게 물린 거려니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모기에게 물린 것과 다른 점이 있다. 빨갛게 부은 상처가 촘촘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가려움과 아픈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물집도 생긴다. 어린아이라면 긁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요 열흘 전에도 그랬다.그때는 풀독이란 걸 아예 몰랐으니 벌레 물린 데 바르는 물약과 파스만 발랐다. 사흘이 지나도록 효과가 없었고, 통증은 더 기승을 부렸다.  참을 수 없어 서울로 올라와 병원을 찾았더니 ‘풀독’이라고 했다.시골에서 자랐으니 풀독이란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풀독에 걸려 보기는 처음이었다.남들은 옻나무 곁을 지나거..

내 몸에 찍힌 추억

내 몸에 찍힌 추억권영상   아내가 안성으로 내려오는 날이라 수박을 한 덩이 사두었다.냉장고에 쏙 넣을 수 있는, 둘이 먹기에 마침맞은 조고마한 수박이 마트에 따로 있었다. 예쁘게 생긴 그놈을 잘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내가 내려올 시간을 기다린다.서울 집 근처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백암까지 한 시간이다.진천행 버스는 길옆 정류장에 사람을 내려놓고는 이내 가는 버릇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버스가 떠나고 난 자리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은 외롭다. 그걸 생각해 개울 둑길에 차를 세워놓고, 정류장 표지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아내를 기다린다.  묘한 게 인생이다.30대 초반, 그때의 신혼 생활도 오늘 같았다. 그때 나는 동해시에 있는 묵호읍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아내는 성남시에 직장을 두고 있었다. 청..

까르찌나, 러시아 현대미술전

미하일 쿠가츠의                                                세르게이 볼코츠의   까르찌나, 러시아 현대미술전권영상  한전 갤러리에 들렀다.요 며칠 전에 본 러시아 미술전이 다시 보고 싶어서다, 처음 본 그림들이었지만 왠지 오래 입은 옷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같은 향수가 나를 이끌었다. 러시아 미술. 러시아 미술에 대해 나는 도통 아는 게 없다. 러시아에 미술이란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그쪽에 문외한이다. 내게 있어 러시아는 의식의 저쪽 동토에 어둡게 묻혀있는 나라다. 아무리 러시아 음악과 러시아 무용과 러시아 박물관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만났다 해도 그건 또 그거일 뿐이다.  내가 러시아를 안 건 19살 무렵이다. 누나를 졸라 누나..

아내의 고집

아내의 고집권영상   장맛비가 열흘 동안 이어지고 있다.기상청은 장마답지 않은 이 장마 기간을 ‘한국형 우기’라고 불러야 한단다.며칠 전에 모종한 콩들이 장맛비에 웃자라 쓰러지고 있다.지난해는 서리태 콩 모종 쉰 포기를 모종가게에서 사다가 심었다. 푸른콩 씨는 늦게 얻어 늦는 대로 텃밭에 직파했다.요령이 생긴 올해는 아예 포트에 콩씨를 심어 손수 모종을 길렀다. 모종은 어느 작물이든 이쁘다. 자라기도 잘 자란다.   “푸른콩 씨도 심었지?”콩 모종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물었다.“한번 심어봤으면 되지 뭘 또 심어.”내 말에 아내가 벌컥 화를 냈다.제 손으로 밭 귀퉁이에 고집스레 모판을 만들더니 푸른콩 씨를 꺼내다 심었다. 열흘 만에 아내는 푸른콩 모종을 텃밭에 냈다.일찍 심은 콩은 못 건져도 늦게 심은 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