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914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권영상  마당에 길고양이가 눈 똥을 치우고 있는데 어휴, 하며 옆집 수원아저씨가 뭘 한 상자 들고 오신다."안녕하세요? 뭘 이렇게 안고 오세요?"추석 명절 쇠고 수원 아저씨를 오는 처음 뵙는다.우리는 명절이 가까이 오면 그 전에 명절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아왔다.그러고 오늘 처음 안성으로 내려왔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라 명절을 깨끗이 잊고 내려왔는데 수원 아저씨는 그 동안 내게 뭘 더 주실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드리고 싶어서요.”데크 난간에 들고온 상자를 어휴, 하며 올려놓았다.봉지째 따오신 포도다.“예. 포도 좀 하고요. 산책하며 주운 밤 좀 하고, 포도밭에 심은 땅콩. 요 얌전한 봉지 속이 궁금하시죠? 짧은 제 실력으로 키운 배 두 알이에요.”수원 아저씨..

풀독이 오르다

풀독이 오르다권영상   팔과 발목 부위가 빨갛게 붓는다.모기에 물린 자국처럼 몹시 가렵다. 풀독이다. 처음엔 이게 모기에게 물린 거려니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모기에게 물린 것과 다른 점이 있다. 빨갛게 부은 상처가 촘촘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가려움과 아픈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서는 물집도 생긴다. 어린아이라면 긁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통증이 심하다.요 열흘 전에도 그랬다.그때는 풀독이란 걸 아예 몰랐으니 벌레 물린 데 바르는 물약과 파스만 발랐다. 사흘이 지나도록 효과가 없었고, 통증은 더 기승을 부렸다.  참을 수 없어 서울로 올라와 병원을 찾았더니 ‘풀독’이라고 했다.시골에서 자랐으니 풀독이란 말은 들어봤다. 하지만 풀독에 걸려 보기는 처음이었다.남들은 옻나무 곁을 지나거..

내 몸에 찍힌 추억

내 몸에 찍힌 추억권영상   아내가 안성으로 내려오는 날이라 수박을 한 덩이 사두었다.냉장고에 쏙 넣을 수 있는, 둘이 먹기에 마침맞은 조고마한 수박이 마트에 따로 있었다. 예쁘게 생긴 그놈을 잘 씻어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내가 내려올 시간을 기다린다.서울 집 근처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 백암까지 한 시간이다.진천행 버스는 길옆 정류장에 사람을 내려놓고는 이내 가는 버릇이 있다. 누구나 그렇듯 버스가 떠나고 난 자리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은 외롭다. 그걸 생각해 개울 둑길에 차를 세워놓고, 정류장 표지 기둥에 기대어 서서 아내를 기다린다.  묘한 게 인생이다.30대 초반, 그때의 신혼 생활도 오늘 같았다. 그때 나는 동해시에 있는 묵호읍에서 직장생활을 했고, 아내는 성남시에 직장을 두고 있었다. 청..

까르찌나, 러시아 현대미술전

미하일 쿠가츠의                                                세르게이 볼코츠의   까르찌나, 러시아 현대미술전권영상  한전 갤러리에 들렀다.요 며칠 전에 본 러시아 미술전이 다시 보고 싶어서다, 처음 본 그림들이었지만 왠지 오래 입은 옷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같은 향수가 나를 이끌었다. 러시아 미술. 러시아 미술에 대해 나는 도통 아는 게 없다. 러시아에 미술이란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나는 그쪽에 문외한이다. 내게 있어 러시아는 의식의 저쪽 동토에 어둡게 묻혀있는 나라다. 아무리 러시아 음악과 러시아 무용과 러시아 박물관과 러시아 정교회 성당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만났다 해도 그건 또 그거일 뿐이다.  내가 러시아를 안 건 19살 무렵이다. 누나를 졸라 누나..

아내의 고집

아내의 고집권영상   장맛비가 열흘 동안 이어지고 있다.기상청은 장마답지 않은 이 장마 기간을 ‘한국형 우기’라고 불러야 한단다.며칠 전에 모종한 콩들이 장맛비에 웃자라 쓰러지고 있다.지난해는 서리태 콩 모종 쉰 포기를 모종가게에서 사다가 심었다. 푸른콩 씨는 늦게 얻어 늦는 대로 텃밭에 직파했다.요령이 생긴 올해는 아예 포트에 콩씨를 심어 손수 모종을 길렀다. 모종은 어느 작물이든 이쁘다. 자라기도 잘 자란다.   “푸른콩 씨도 심었지?”콩 모종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물었다.“한번 심어봤으면 되지 뭘 또 심어.”내 말에 아내가 벌컥 화를 냈다.제 손으로 밭 귀퉁이에 고집스레 모판을 만들더니 푸른콩 씨를 꺼내다 심었다. 열흘 만에 아내는 푸른콩 모종을 텃밭에 냈다.일찍 심은 콩은 못 건져도 늦게 심은 콩..

팥 잎싹은 예쁘다

팥 잎싹은 예쁘다권영상  팥을 심었다.태어나 첫 경험이다.서리태 콩은 지난해 가꾸어봤다.밭에 콩씨를 직파한 게 아니라 모종가게에서 파는 콩 모종을 사다가 심었다. 장마에 요앞 다리가 끊겼을 때다.쉰 포기. 7월 8일에 심은 걸로 지난해 달력에 적혀 있다.  텃밭에 빈 땅이 있는 걸 알고 아내가 연일 팥! 팥! 팥 타령이다.5월에 도라지 씨앗을 뿌렸는데 하나도 나오지 않아 묵히고 있는 손바닥만 한 빈 땅이 있다. 아내가 그걸 본 거다. 거기다가 심으면 딱이란다.나도 그 생각은 하고 있었다.대농을 하시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팥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아버지가 안 계시니 대신 인터넷에 물었다.  중부지방은 6월 중순이 적기란다.때가 마침맞다. 호미로 땅을 헤친 자리에 팥 세 알씩 넣고 묻었다.조루에 물을 ..

아침에 아내가 말했다

아침에 아내가 말했다권영상   “오늘 어디 좀 나갈 데 없어?”아침에 아내가 말했다.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차렸다.“알았어.”식사를 마치고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으면서 길을 나섰다.캔버스를 세워놓고 붓 한 번 잡지 못하는 아내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집에 누가 있으면 마음이 열리지 않아 불편할 때가 있다. 그게 부부라거나 자식이어도 그렇다.  풍부한 자유를 받아들고 쫓겨나듯 집을 나서고 보니 막막했다. 전철에 올랐다. 그제야 갈 곳이 떠올랐다. 종묘다. 며칠 전, 서순라길 모임을 한 적이 있었다. 종묘 담장을 끼고 순라꾼들이 다니던 그 길을 걸어 북촌까지 갔었다. 그때 종묘 담장 너머로 보이던 늙은 갈참나무 숲이 궁금했다. 왜 이씨 종묘에 오얏나무가 아니고  갈참나무일까.종로 3가역에서 내려 ..

아침에 물을 주다

아침에 물을 주다권영상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곧장 텃밭으로 나간다. 흙과 직면하여 사는 게 오랜 꿈이었다. 가뭄에 텃밭에 나가면 할 일이 있다. 작물에 물을 주는 일이다.밭에 토마토 20포기가 크고 있다. 안성에 내려온 지 11년째인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토마토를 가꾸었다. 토마토에 대한 아련한 십 대의 기억이 있다. 어머니 병환 때문에 아버지는 돈이 될 만한, 당시의 특용작물인 토마토 농사를 지으셨다. 나를 앞세워 토마토 모종을 밭에 내고, 나를 앞세워 토마토가 익으면 읍내 가게에 내다팔던, 좀은 쓸쓸했던 과거가 이 나이 먹도록 내 몸에 상처처럼 남아있다.  토마토를 사주는 가게가 없으면 손수레를 끌고 10리길을 그냥 돌아왔다. 그때 아버지는 마른기침을 얼마나 하시던지. 토마토가 병원비 마련에 ..

피아노를 듣는 밤

피아노를 듣는 밤권영상   창밖에 쪼매만한 상현달이 떴다. 테두리 흔적만 남은 명주실 같이 가는 달이다. 시계를 보니 9시 무렵.나는 어린 상현달에 끌려 다락방에 올라가 창을 열었다.집이 동향이니 달이 보일 리 없다. 대신 건너편 산으로 부는 컴컴한 참나무 숲 바람 소리가가득 밀려온다. 숲 바람은 피아노 연주곡처럼 한 차례 소란스럽게 다가와서는 다시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다가 다시 소란을 떤다.나는 휴대폰에서 쇼팽의 녹턴을 꺼냈다.참나무 초록물이 잔뜩 든 밤바람 소리를 배경으로 피아노 소곡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어두컴컴한 숲을 바라본다.음악을 열면 음악에 빠지기보다 오히려 긴 상념에 빠진다. 나이를 먹어 더욱 생각이 많다. 나의 상념은 음악을 겉돌게 한다. 구성이 복잡할수록 더 ..

생각이 싫은 날

생각이 싫은 날권영상  생각하기 싫은 날이 있다.그 동안 복잡한 생각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글 쓴답시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생을 진절머리가 날 만큼 생각에 끄달리며 살다. 오늘은 안성집 데크에 페인트칠을 해야 하고, 토마토며 고추 모종을 해야 한다. 나는 동네 페인트 가게에 들러 목재 보호용 오일 스테인 4리터짜리 두 통을 주문했다. 주인은 내가 주문한 페인트 통의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잘 섞은 뒤 다시 뚜껑을 덮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걸 차에 싣고 안성을 향했다. 1시간을 달려 백암 장터 근방에 차를 세우고 모종을 샀다. 토마토와 고추, 가지, 오이 등속을 종이상자에 넣어주는 대로 들고 와 차에 실었다. 그리고 상자 위에 신문지를 덮고 마트에서 산 양배추 한 덩이를 얹었다.점심을 해결하고 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