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내의 고집

권영상 2024. 7. 10. 10:24

 

아내의 고집

권영상

 

 

 

장맛비가 열흘 동안 이어지고 있다.

기상청은 장마답지 않은 이 장마 기간을 ‘한국형 우기’라고 불러야 한단다.

며칠 전에 모종한 콩들이 장맛비에 웃자라 쓰러지고 있다.

지난해는 서리태 콩 모종 쉰 포기를 모종가게에서 사다가 심었다. 푸른콩 씨는 늦게 얻어 늦는 대로 텃밭에 직파했다.

요령이 생긴 올해는 아예 포트에 콩씨를 심어 손수 모종을 길렀다. 모종은 어느 작물이든 이쁘다. 자라기도 잘 자란다.

 

 

“푸른콩 씨도 심었지?”

콩 모종을 들여다 보던 아내가 물었다.

“한번 심어봤으면 되지 뭘 또 심어.”

내 말에 아내가 벌컥 화를 냈다.

제 손으로 밭 귀퉁이에 고집스레 모판을 만들더니 푸른콩 씨를 꺼내다 심었다.

열흘 만에 아내는 푸른콩 모종을 텃밭에 냈다.

일찍 심은 콩은 못 건져도 늦게 심은 콩은 건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아내 앞에서 더는 푸른콩에 대한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조그만 텃밭이지만 조금씩 서리태도 심고, 팥도 심고, 이렇게 청태도 심었다.

 

 

청태는 어렸을 적 아버지도 심으셨다.

추석 명절이면 어머니는 청태를 꺾어 파란 풋콩으로 송편을 빚으셨다.

송편이 익으면 송편에 얼비치던 파란 빛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맛도 좋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 아버지의 손에서 푸른콩이 사라졌다. 아마 노란 콩보다 수익성이 낮거나 중국이나 미국으로부터 저렴한 콩을 대량으로 수입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 알았지만 6. 25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에 참전한 미국이 우리나라 재래종 콩을 유심히 본 모양이다. 미 농무부는 전후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와 비바람에도 쓰러지지 않는 난쟁이 콩씨를 가져가 키가 작으면서도 수확량이 많은 콩으로 개량했다.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수입하는 미국산 콩이다.

재래종은 그 점에서 위대하다.

 

 

푸른콩은 제주도 토종 콩이다. 제주독새기콩이라 불리는 멸종 위기종이다.

“우리 토종 콩인데 한 알을 거두더라도 어떻든지 심어야지.”

아내가 무심한 나를 탓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토종 씨를 지키려는 마음이 아내에게 있었다.

푸른콩 씨는 지난 해 여름, 토종씨앗을 지키는 아내의 고향친구로부터 아내가 한줌 얻어온 거다. 많건 적건 땅에다 작물을 심어보면 자신도 모르게 우리 것, 우리 재래의 것에 대한 애정이 생긴다. 좋은 것을 먹자는 게 아니라 우리 것을 지키자는 토종종자에 대한 충심 같은 것 말이다.

 

 

팔순을 넘기신 속초누님도 아주 특별한 씨앗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심으시던 조생종인 빨간 강낭콩 씨앗이다. 누님은 그 강낭콩 씨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 아버지 가신 뒤 그 씨앗을 얻어 마당가 텃밭에 해마다 심으신다고 했다.

안성에 집 하나를 구한 나도 누님으로부터 그 씨앗을 구했다.

재배 경험을 같이 주고받으며 아버지가 평생을 심어오신 빨간 강낭콩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손꼽아 보니 아버지 손때가 묻은 씨앗으로 대를 이어온 지 100여 년이 넘는다.

 

 

빨간 강낭콩을 거둘 때마다 나는 텃밭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요즘 강낭콩 재배 농가는 거의 없다. 푸른콩 재배 농가도 거의 없다.

언제까지 갈 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토종인 푸른콩을 지켜보려는 아내의 고집이 기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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