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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는 법을 배운다

머무는 법을 배운다권영상 집에서 가까운 동네 산을 즐겨 오른다.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미 때문이다.소년 시절에 만들어진 버릇이 아닌가 한다. 그때는 주로 마을 인근 해안가를 따라 혼자 30리도 가고, 50리도 가곤 했다.나중 서울에 정착했는데, 산을 끼고 있는 동네였다.서울이라고 나의 걷는 성미를 바꾸지 못했다. 직장은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 시간 중 몇 정거장은 버스에서 내려 걷고는 했다, 50대 초반에 마지못해 승용차를 샀지만 내내 걸었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산들도 나는 홀로 찾아가 오랫동안 걸었다. 나는 많은 날을 신들린 듯이 걸었다.물론 동네 산을 오르는 일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휴일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퇴근을 하면 일몰을 본다거나 떠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권영상 식탁에서 간장종지가 사라졌다.어린 시절엔 밥상에 꼭 간장종지가 올라왔다. 콩알만 해도 대범하게 밥상 한가운데에 앉았다. 하얀 사기종지거나, 파란 청자 종지였다. 명절 끝이면 놋그릇 종지가 나왔다. 종지는 작고 오목하다. 그릇답지 않게 잔망스럽거나 또릿또릿하다. 간장종지에 담기는 간장은 뒤란 간장독에서 갓 떠온 오래 숙성된 검은색 간장이다. 밥상에 국수가 나올 땐 쪽파나 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들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양념간장이 나온다,이 무렵, 간장이 하는 일은 국맛을 각자 입맛에 맞게 내는데 쓰였다. 한 식구여도 연세 많으신 아버지 입맛이 다르고, 막내인 나의 입맛이 달랐다. 가끔씩 전이 올라올 때가 있다. 명절에 지진 전은 오래 간다. 그걸 상에 올릴 때 간장종지는..

길 건넛집 닭 이야기

길 건넛집 닭 이야기권영상 길 건너 붉은지붕집에 닭이 있다.수탉 한 마리와 암탉 세 마리다. 아침마다 그 집 주인은 닭장 문을 열어준다. 닭들은 기다렸다는 듯 앞다투어 마당으로 몰려나온다. 그리고 주저없이 그 집 대문을 벗어난다. 대문 밖엔 고추밭이며 참깨밭, 가을엔 배추 무가 크는 농가의 밭들이다. 그들은 그 밭에 뛰어들어 달리고 날고 산책하듯 조용히 밭고랑을 거닐기도 한다. 그들은 때로 우리 집에도 놀러온다. 우리 집으로 오려면 길을 건너고, 바위로 쌓아올린 축대를 타고 올라야 한다. 축대는 닭들에게 큰 장애물이지만 그들에겐 수탉이 있다. 수탉은 세 마리의 암탉을 데리고 장애물을 타고넘어 온다. 주로 뜰보리수나무 밑에서 논다. 수탉이 크고 힘센 발로 흙이나 풀섶을 긁어놓으면 암탉들이 모여드는 ..

땅을 기는 두 식물의 전략

땅을 기는 두 식물의 전략권영상 폭염에 잘 사는 풀이 있다. 쇠비름이다. 식용하는 참비름이나 개비름과는 모양이 다르다. 줄기는 있으되 다른 식물들처럼 위로 크는 걸 포기하고 땅을 기는 전략을 취한다. 평면에 그려놓은 나무 모양이다. 뽑으려고 손을 뻗다가 앗 지렁이네! 하고 손을 거두지만 지렁이가 아님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줄기가 지렁이를 닮아 붉고 통통하고 매끈하다. 맨손으로 풀을 뽑다가 나는 몇 번이나 쇠비름 줄기가 지렁이인 줄 알고 멈춤 하여 놀란 적이 있다. 자기 몸에 위해를 가하려는 자를 위협하는 속임수 전략인지 모르겠다. 요즘 하도 폭염이 심해 아침저녁으로 파밭에 물을 뿌려준다. 두어 번 물 뿌려준 뒤에 보면 파밭고랑이 파랗다. 어제 못 보던 쇠비름이 하루 이틀 사이에 나온다. 씨앗이 ..

할아버지 한 분

할아버지 한 분권영상 시간 없어! 하고내가 서두르면시계 속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한 분내게 조용히 이르신다.시간은 많느니! 하고.그분의 고향은 커다란 벽시계다. 시계 속에 눌러 사신지 벌써 오래 됐다.그분은 하루 종일시계 속에 쌓인 어수선한 시간을쪽 고르게 가려내신다.그러고는 아침마다 식구수대로 똑 같이 나누어주신다.가끔 시계를 위해또각또각 시계밥을 주실 때에 보면그분의 허리가 굽다. 2026년 제 2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