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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속 나와 우리의 소년을 위해

과거 속 나와 우리의 소년을 위해초등학교 가을 운동회 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섰을 때 운동회는 후반을 타고 있었다.에어볼 나르기 게임을 위해 5. 6학년들이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추어 개선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입장한 청군과 백군이 게임장을 사이에 두고 섰다. 백군 앞줄엔 대형풍선인 빨간 에어볼이. 청군 앞줄엔 파란 에어볼이 놓였다. 바람을 한껏 먹은 부푼 에어볼을 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내 마음은 설레었다.게임 전에 스태프 네 명이 나와 경기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에어볼을 머리 위로 올려 잡고 달려가 반환점을 돌아오는 경기다.사회자의 호루라기 신호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동시에 이를 지켜보던 백군과 청군의 응원도 시작되었다. 확성기에선 경기에 맞는 속도의 경쾌한 음..

길에서 만난 싹싹한 귀인

길에서 만난 싹싹한 귀인권영상 백암에 들러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한 달에 두어 번씩 안성 텃밭에 내려가 사나흘 머물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이 일을 13년째 하고 있다. 간단찮은 일이다. 두 집 살림이나 마찬가지. 그래도 싫지 않은 건 아내나 나나 집을 떠난다는 홀가분한 기분 때문이다.내려갈 준비를 부지런히 한다 해도 오전 11시다.백암에 도착하면 12시. 우리는 요즘 순댓국 먹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백암엔 텔레비전에도 여러 차례 나온 이 근방에선 꽤 유명한 순댓국집이 있다.5일 장날이 아니면 차는 주로 장터에 주차한다. 오늘이 장날도 아닌데 만차다. 할 수 없이 지난번에 한번 들른 칼국수 집으로 향했다. 읍내에서 20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그곳, 가는 길이 좋다. 어디든 중심가를 벗어나 숲과 ..

엄친딸

엄친딸권영상 걘 뭐든 잘 하지.공부, 따놓은 1등이지.운동도 잘 하고 마음씨도 싹싹하지.엄마는 나갔다 돌아오면 걔, 걔, 걔, 하지.잊을만 한 데도 잊지 않고걔 걔 걔.걔는 나보다 커서멀리서도 우뚝해 보이지. 걘 뭐든 잘 하지.공부, 따놓은 1등이지.놀기도 잘 놀고 논다하면 화끈하지.엄마는 친구랑 전화하면 걔, 걔, 걔, 하지.그칠만 한 데도 쉬지 않고걔, 걔, 걔.걔는 나보다 예뻐멀리서도 환해 보이지. 2026년 9월호

머무는 법을 배운다

머무는 법을 배운다권영상 집에서 가까운 동네 산을 즐겨 오른다.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미 때문이다.소년 시절에 만들어진 버릇이 아닌가 한다. 그때는 주로 마을 인근 해안가를 따라 혼자 30리도 가고, 50리도 가곤 했다.나중 서울에 정착했는데, 산을 끼고 있는 동네였다.서울이라고 나의 걷는 성미를 바꾸지 못했다. 직장은 버스로 한 시간쯤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나는 그 시간 중 몇 정거장은 버스에서 내려 걷고는 했다, 50대 초반에 마지못해 승용차를 샀지만 내내 걸었다. 지방에 산재해 있는 산들도 나는 홀로 찾아가 오랫동안 걸었다. 나는 많은 날을 신들린 듯이 걸었다.물론 동네 산을 오르는 일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휴일만이 아니라 평일에도 퇴근을 하면 일몰을 본다거나 떠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권영상 식탁에서 간장종지가 사라졌다.어린 시절엔 밥상에 꼭 간장종지가 올라왔다. 콩알만 해도 대범하게 밥상 한가운데에 앉았다. 하얀 사기종지거나, 파란 청자 종지였다. 명절 끝이면 놋그릇 종지가 나왔다. 종지는 작고 오목하다. 그릇답지 않게 잔망스럽거나 또릿또릿하다. 간장종지에 담기는 간장은 뒤란 간장독에서 갓 떠온 오래 숙성된 검은색 간장이다. 밥상에 국수가 나올 땐 쪽파나 고추를 송송 썰어 넣고 들기름을 한 방울 떨어뜨린 양념간장이 나온다,이 무렵, 간장이 하는 일은 국맛을 각자 입맛에 맞게 내는데 쓰였다. 한 식구여도 연세 많으신 아버지 입맛이 다르고, 막내인 나의 입맛이 달랐다. 가끔씩 전이 올라올 때가 있다. 명절에 지진 전은 오래 간다. 그걸 상에 올릴 때 간장종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