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9

사다리가 있는 풍경

사다리가 있는 풍경 권영상 내려야할 전철역을 놓쳤다. 정신을 딴 데 파느라 한 정거장 더 가고 말았다. 역에서 내려 지상에 올라와 보니 알겠다. 봄이 깊다. 가로수들은 이미 녹음으로 우거졌고, 햇빛이 덥다. 놀이터를 지나고, 음식점 골목을 지나고, 한길을 건넌 뒤 느티나무 그늘 벤치에 잠시 앉았다. 무심코 눈이 가는 곳에 갤러리가 있다. 일어나 그리로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그림을 보는 이는 나 하나뿐.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성격이 다른 네 화가의 공동전시회다. 그 중에 내 눈에 띈 그림들이 있었다. 사다리를 주제로 한 풍경이다. 사다리는 이층 옥상에 세워져 있거나 이팝나무 꽃 가득 핀 나무 둥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사다리가 있는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내가 그 사다리..

홍시

홍시 권영상 이런저런 일로 부모님 추석 성묘가 면목 없이 늦어졌다. 어찌 됐던 그 일이 오늘 이루어져 천만 다행이다. 그 동안 마음으로 부모님께 성묘가 늦어질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은 드렸다. 뵙고 나니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졌다. 96세를 살다 가신 어머니는 인생의 많은 세월을 우환으로 시달렸다. 그 우환의 절반을 어머니는 불행히도 병원에서 보내셨다. 그런 탓에 나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게 어떤 빛깔인지, 어떤 향기인지, 깊다면 얼마나 깊고, 넓다면 얼마나 넓은지를 알지 못한 채 자라서 어른이 됐다. 그런 내 곁에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항상 계셨다. 항상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어머니 병구완을 위해 논밭에서 허덕이셨다. 어린 나는 가계비..

아버지의 젊은 날의 목소리

아버지의 젊은 날의 목소리 권영상 고향 친지로부터 청첩장을 받았다. 아무리 코로나가 무섭다 해도 축의금만 달랑 보내기가 미안했다. 당일로 되짚어 오는 ktx 표를 미리 예매했다. 돌아오는 표는 넉넉하게 오후 5시로 잡았다. 예식은 오전 11시였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축하해 주러왔다. 반가운 고향 분들을 만났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냥 함께 있을 수 없었다. 열차표를 구실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열차 시간에 대려면 4시간이나 남았다. 예식장소 인근 호수 주변의 습지와 습지를 따라난 둑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여유다. 소년 시절, 아버지는 병석에 누운 어머니를 두고 혼자 일하셨다. 그때 내가 아버지를 돕는 일은 소 먹이는 일이었다. 소는 농사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분신이나 다름없었다. 어..

아버지의 새벽밥

아버지의 새벽밥 권영상 잠자리에서 눈을 떴다. 긴장해 그런지 원하던 시간대에 깨어났다. 시계를 본다. 새벽 5시다. 오늘은 남해안에 닿아있는 조그마한 도시에서 치루어야 할 볼일이 있다. 가는 데만도 다섯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다. 약속시간에 대려면 6시쯤 집을 나서야 한다. 아내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나가려 했는데 벌써 새벽밥을 준비하고 있다. 5시인데도 늦가을이라 그런지 바깥이 칠흑처럼 컴컴하다. 간밤 기상예보에 날씨가 올해 들어 가장 춥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거실이며 방바닥이 차다. 식탁에 앉아 아내가 차린 따뜻한 새벽밥을 먹으려니 새삼 그 옛날, 아버지의 새벽밥이 떠오른다. 오늘도 그때처럼 새벽 하늘에 삼태가 떠 있겠다. 늦가을 동녘 하늘에 똑똑하게 보이는 세 별. 그 별이 삼태, 삼태성이다. 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