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권영상
이런저런 일로 부모님 추석 성묘가 면목 없이 늦어졌다.
어찌 됐던 그 일이 오늘 이루어져 천만 다행이다. 그 동안 마음으로 부모님께 성묘가 늦어질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은 드렸다. 뵙고 나니 마음이 많이 홀가분해졌다.
96세를 살다 가신 어머니는 인생의 많은 세월을 우환으로 시달렸다. 그 우환의 절반을 어머니는 불행히도 병원에서 보내셨다. 그런 탓에 나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게 어떤 빛깔인지, 어떤 향기인지, 깊다면 얼마나 깊고, 넓다면 얼마나 넓은지를 알지 못한 채 자라서 어른이 됐다.
그런 내 곁에는 어머니 대신 아버지가 항상 계셨다. 항상이라고는 하지만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어머니 병구완을 위해 논밭에서 허덕이셨다. 어린 나는 가계비의 내역을 알진 못해도 아버지의 구부정하신 뒷모습, 꺼칠하게 나 있는 수염, 세수하실 시간을 종종 놓친 푸석한 얼굴을 보며 아버지가 짊어지신 짐이 얼마나 큰 지를 짐작했다 .
식사는 아버지와 겸상을 하였지만 그 시절의 아버지와 어린 나는 대화랄 게 없었다. 그 사이에 어머니가 있어야 이야기가 건너가고 건너올 수 있을 텐데, 아버지와 아들의 거리는 한정없이 멀었다. 엄한 분이 아니셨어도 아버지는 하실 말씀만 하시는 분이었다.
“밥 먹었냐?”
“책가방 풀어놓고 밭에 가자.”
“전깃세 나온다. 불 끄고 얼른 자거라.”
그 외의 대화라는 건 별반 없었다. 대화는 주로 용건 중심이었다.
그런 아버지셨어도 내 마음엔 아버지는 아버지였으면서 또한 어머니였다. 나는 지금도 지난 날의 아버지의 그 무뚝뚝한 말소리에서 어렴풋한 모성을 느낄 때가 많다.
성묘를 마치고 내려오는 마을 길옆에 감나무 감이 굵다. 아버지는 뜰에 감나무를 두고 싶어하셨다. 고욤나무 대목을 심어 접을 잘 붙이는 외삼촌을 부르셨지만 간신히 한 그루를 살려내시고 가셨다. 치아가 안 좋으셨던 아버지는 어쩌면 홍시를 잡숫고 싶어 하셨을지 모른다. 높은 가지 끝에 빨간 홍시 하나가 어머니를 살리시겠다는 아버지의 이념처럼 매달려 있다.
고향 일을 다 마치고, 저녁 무렵에야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차가 횡성휴게소를 지날 무렵 FM을 켰다. 나직이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는 길을 달렸다. 어둑한 시간 귀에 익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 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 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눈이 오면 눈 맞을세라.“
나도 몰래 이 단순하면서도 서정미가 느껴지는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두워지는 밤, 부모님 성묘를 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밤, 인생처럼 멀고 먼 길 위에서 ‘홍시’를 부르는 내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사랑이 뭔지 모르고 살아온 내게도 이 노래가 나를 울컥하게 했다. 여태 어머니를 잘 모르고 살아온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고요히 고여있던 어머니의 사랑이 밀려나오는 듯 했다.
나는 혼자라는 공간의 힘을 빌어 어머니를 한번 불러 보았다.
언제나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먼저 불렀고, 부모님을 떠올리면 먼저 아버지를 떠올렸는데, 그때 내 입에선 어머니란 말이 불쑥 나왔다. 이 나이를 먹도록 어머니 없는 아들처럼 살다가 여기 이쯤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되다니.
안녕히 잘 지내세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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