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 이 사람 너무 좋아말게
권영상
오랜만에 들로 나갔다.
내가 사는 곳에서 들이라고 하면 요 앞, 산 너머 벽장골이다. 산과 산 사이에 펼쳐진 논벌이 벽장골이다. 산모롱이를 돌아서자 논벌이 누렇다. 논두렁에 내려서서 벼 포기를 움켜잡아 본다. 내 손아귀가 큰데도 한 손에 다 잡히지 않을 만큼 포기가 찼다.
허리를 펴는데 논두렁 저 앞에 별안간에 나타나 달려가는 저건, 저건 논병아리, 논병아리 가족이다. 어미가 앞서고 새끼 세 마리가 털실뭉치처럼 도르르 구르며 따라간다.
나는 그들이 논두렁길을 다 갈 때까지 멈추어 섰다. 그들은 노란 가을 햇살을 받으며 돌돌돌 굴러가더니 이내 벼포기 사이로 깜물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그들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가 보았다. 한낮 꿈처럼 사라지고 없다.
이 근방 논에 물쿵뎅이가 있다. 거기는 물도 있는 수렁이라 벼를 못 심는다. 겨울철에는 다른 곳은 다 말라도 거기만은 물이 있어 얼음이 언다. 눈 내린 날 얼음장 위에는 마른 목을 적시러 오는 오리, 들새, 들쥐, 고라니 발자국이 연속무늬처럼 선명히 나있다. 암만 추워도 얼음장엔 숨구멍처럼 열려있는 물구멍이 있다.
요즘에도 노을 지는 어둑한 하늘로 쉭쉭쉭 날아오는 새들이 있다. 오리다. 논병아리도 그들 틈에 끼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저수지를 떠나 저녁이면 물쿵뎅이가 있는 이 논벌에 날아와 깃든다.
듬성듬성 논두렁에 깎아놓은 풀 더미에서 푸슥푸슥 풀 뜨는 냄새가 난다. 가을빛도 좋고 가을볕도 좋지만 가을 냄새 중에 풀 뜨는 냄새만큼 좋은 것도 없다. 풀 비린내도 풀 비린내지만 푸슥푸슥 피는 풀냄새는 감미롭다. 따스하다. 약간 취기가 돈다.
그런데 이 큰 논벌에 꼭 있어야할 게 없다. 허수아비. 허수아비가 없다. 허수아비 없는 논이라면 왠지 허전하다. 새를 보러온 이가 도랑둑에 서서 우여! 우여! 참새를 쫓고, 허수아비도 새 쫓는 일에 한 몫 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그러나 정작 허수아비는 과수원 곁 수수밭에서 만났다. 정확히 수수밭과 배추밭 언저리에 서 있다. 8월에 이랑에 심어놓은 배추 씨앗도 지킬 겸, 익어가는 수수도 지킬 겸, 키 큰 수수밭보다 참새 눈에도 잘 띄게 할 겸 수수밭과 배추밭 언저리에 세운 듯하다.
허수아비가 재미있다. 긴팔 티에 긴 바지를 입은 허수아비가 빨간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은 허수어미를 은근히 껴안고 서 있다. 마스크도 썼다. 빠끔히 눈만 보이지만 허수어미를 안고 있는 허수아비가 좋아죽겠다는 표정이다. 나름대로 예술미가 있다.
이 녀석 허수아비는 본디 누구의 자식인고 하니 남산골 허 대감집 일곱째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내가 아는 바로는 큰아들 이름은 허장이고, 둘째는 허풍이요, 셋째는 허방, 넷째는 허벅, 다섯째는 허당, 여섯째 이 놈은 이름도 좋다. 허허다, 일곱째아들 이 녀석이 바로 여기 서 있는 허수다.
그 허수가 운도 좋게 벼가 누렇게 익는 벽장골에 내려와 이쁘장한 색시를 얻어 달콤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참말 보기에 좋다. 수수밭에 날아드는 새도 볼 겸, 가을 나들이도 할 겸, 호젓한 이 들판에서 애정도 즐길 겸 아주 어깨가 으쓱 올라가 있다.
“허수, 이 사람 너무 좋아말게!
나는 이쪽 한 길에 서서 정신을 못 차리는 허수를 건너다보고 소리쳤다.
그러는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알근 체도 않는 그를 두고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 길에 길가에 내놓고 파는 포도 몇 송이를 샀다. 술 생각이 간절하나 구매할 곳이 없는 게 흠이다.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밤의 유에프오 (0) | 2022.09.29 |
---|---|
홍시 (0) | 2022.09.29 |
기억의 좌표 (0) | 2022.09.11 |
추석이 가까운 안마당 풍경 (0) | 2022.08.31 |
느티나무 길에서 만난 고양이 (0) | 2022.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