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6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

가을은 혀 끝에서 온다권영상  마당에 길고양이가 눈 똥을 치우고 있는데 어휴, 하며 옆집 수원아저씨가 뭘 한 상자 들고 오신다."안녕하세요? 뭘 이렇게 안고 오세요?"추석 명절 쇠고 수원 아저씨를 오는 처음 뵙는다.우리는 명절이 가까이 오면 그 전에 명절 선물을 서로 주고 받아왔다.그러고 오늘 처음 안성으로 내려왔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라 명절을 깨끗이 잊고 내려왔는데 수원 아저씨는 그 동안 내게 뭘 더 주실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드리고 싶어서요.”데크 난간에 들고온 상자를 어휴, 하며 올려놓았다.봉지째 따오신 포도다.“예. 포도 좀 하고요. 산책하며 주운 밤 좀 하고, 포도밭에 심은 땅콩. 요 얌전한 봉지 속이 궁금하시죠? 짧은 제 실력으로 키운 배 두 알이에요.”수원 아저씨..

고양이를 혼내키면 호랑이가 온다

고양이를 혼내키면 호랑이가 온다 권영상 무심코 창문 밖을 내다본다. 그 놈이 간다. 털빛이 하얀 능글맞은 길고양이다. 데크 앞, 텃밭 이쪽과 저쪽으로 내가 늘 지나다니는 마당길을 마치 제 길처럼 가고 있다. “이 놈!” 소리쳐 을러메어본다. 발걸음을 멈춘 흰털 고양이가 데크 난간 사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대꾸하기 싫은 모양이다. 세상에 초연한 표범처럼 유유히 가던 길을 간다. 전엔 이 놈! 하면 놀라 냅다 달아나던 녀석이 요샌 들은 척 만 척이다. 내가 저를 향해 쫓아가는 흉내를 내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실없이 왜 그러냐는 투로 느긋하게 걸어 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아니, 저 놈이! 항상 안달하는 쪽은 나다. 영물이 그렇듯 고양이도 나이 먹을수록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듯하다. 요기 대여섯 집 마..

나는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됐다

나는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됐다 권영상 모임에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내의 바깥 볼일에 맞추어 함께 나오다 보니 그만 좀 일찍 나왔다. 기껏 아파트 정문에서 서로 헤어질 걸 가지고 20여분이나 당겨 나왔다. 시간을 들여다볼수록 좀 아쉽다. 혼자 전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갑자기 얻은 이 많은 시간 때문에 늘 지나치던 길갓집 장미 앞에 서 본다. 흔히 보는 빨간 줄장미가 아니다. 분홍색, 해당화꽃 모양의, 낯설지만 예쁜 장미꽃이다. 다가가 코를 내어 향기를 맡아본다. 곱다. 이름이 궁금해 사진을 찍어 ‘모야모’에 보냈더니 시애스타라 한다. 지중해 연안이 고향인, 꽃말이 정오인 낮잠이다. 모르는 길고양이 한 놈이 내 발아래에 다가와 나를 쳐다본다. 야옹! 말을 걸어본다. 나를 데려다 줄 것처럼 앞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