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혼내키면 호랑이가 온다
권영상
무심코 창문 밖을 내다본다. 그 놈이 간다. 털빛이 하얀 능글맞은 길고양이다. 데크 앞, 텃밭 이쪽과 저쪽으로 내가 늘 지나다니는 마당길을 마치 제 길처럼 가고 있다.
“이 놈!”
소리쳐 을러메어본다.
발걸음을 멈춘 흰털 고양이가 데크 난간 사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더니 대꾸하기 싫은 모양이다. 세상에 초연한 표범처럼 유유히 가던 길을 간다. 전엔 이 놈! 하면 놀라 냅다 달아나던 녀석이 요샌 들은 척 만 척이다. 내가 저를 향해 쫓아가는 흉내를 내도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실없이 왜 그러냐는 투로 느긋하게 걸어 울타리 사이로 빠져나간다.
아니, 저 놈이!
항상 안달하는 쪽은 나다.
영물이 그렇듯 고양이도 나이 먹을수록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듯하다.
요기 대여섯 집 마을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길고양이가 대충 세 마리 정도다. 몇 년 전만 해도 10여 마리가 넘었다. 고양이는 우리 뒷집이 키웠다. 그때는 두 마리였다. 혼자 사니까 동무삼아 가족삼아 키우겠지, 했다.
그랬는데 그 고양이 때문에 옆집 할머니와 큰 싸움이 났다.
뒷집이 일하러 나간 사이면 빈집을 차지한 고양이들이 행복에 겨워 노래를 불렀다. 배부른 애들이 제멋에 겨워 흥얼거리듯 주저리주저리 노래를 뽑아댔다. 밤이 이슥해지면 이번에는 좀 듣기 거북한 음란한 소리로 요란을 피웠다.
연세 많으신 옆집 할머니가 드디어 고양이를 치우라고 언성을 높였다.
결국 몇 달을 실랑이를 벌이던 뒷집은 고양이를 남겨둔 채 이사를 가버렸다.
그 고양이들이 대책 없이 십여 마리로 불어났다. 그 후 그들은 여기 대여섯 집을 두고 치열하게 영역 싸움을 했고, 지금 남아있는 것들이 세 마리다.
그 세 마리 중에 한 마리가 이 흰털 고양이다. 이 마을에서 그는 강자고 제왕이다. 누구도 그를 넘보는 고양이는 없다. 그는 밤낮으로 자신의 영역을 근엄하게 순시한다. 자신의 눈 밖에 나면 그가 동족이든 사람이든 그냥 넘기지 못한다.
언젠가 텃밭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다.
검정고양이 한 녀석이 집 뒤에서 살곰 나타났다. 그에게 눈을 주자, 그는 내 눈에서 무얼 읽었는지 내 곁으로 다가와 야옹, 하고 앉았다.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정이었다. 마침 윗주머니에 있던 젤리를 꺼내 주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흰 털 고양이란 놈이 휙 날아와 검정고양이를 앞발로 후려쳤다. 내가 흰털 고양이를 향해 소리치며 주먹을 을러메자 그는 바람처럼 달아났다.
그때부터다. 며칠 집을 비웠다가 내려와 보면 뜰 마당에 고양이 똥이 여기저기 있었다. 흰털 고양이 녀석의 '여기는 내 땅'이라는 영역표시가 분명했다. 이제는 자신과 한판 싸워보자는 수작 같았다. 그의 생애는 치열한 쟁탈의 역사였으니 사람이 두려울까. 어떤 날 아침에 나가보면 흰 뼈를 물어다 창 밑에 두거나 죽은 쥐를 물어다 놓는다.
고양이를 놀래키면 호랑이가 온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혐오스러운 것들로 나를 제압하기 위해 온갖 작폐질을 한다. 그에 대해 흉을 보고 난 날은 풀가시에 찔리거나 수도꼭지가 고장 난다. 그때마다 내가 쩔쩔매는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며 웃고 있을 것 같다. 앙큼하고 독스러운 게 흰털 고양이다.
<교차로신문> 2023년 10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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