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나 6

강인한 것들

강인한 것들 권영상 점심으로 순대국을 먹고 나올 때다. 씨앗가게 앞을 지나던 아내가 길가에 내놓은 씨앗 자루 앞에 앉았다. 종자용 쪽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씨알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쪽파는 뭣 하러 심으려고!” 나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지난해 아내는, 친구한테 얻은 쪽파 한 봉지를 심어 재미 본 경험이 있다. 아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쪽파 자루 안의 쪽파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나도 손을 넣어 쪽파를 만져봤다. 서서 본 내 판단과 다름없이 쭉정이에 가까웠다. 알맹이가 있다면 끄트머리쯤에 조그마한 마디 하나가 만져질 뿐 속이 비어있었다. 다음에 사지 뭐, 그 말을 하려는데 아내가 주인에게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대신 많이 드릴 게요. 8천원이요.” 했다. ..

40대, 그쯤 나이

40대, 그쯤 나이 권영상 “그 사람 몇 학번이지?” 맞은편에서 걸어와 내 곁을 지나가는 두 남자의 말이 귀에 선뜻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 나이가 서로 비슷한 40대다. 재킷을 벗어 어깨에 걸쳤다. 아마 점심을 먹고 직장으로 돌아가는 길인 듯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하나씩 들었다. 문득 보라 아빠가 떠오른다. 그는 ‘당신 몇 학번이야!’ 그런 좀은 상스러운 말을 즐겨 썼다. 그때 내 나이도 40대쯤. 간신히 대출을 내어 조그마한 빌라 3층에 머물러 살았다. 2층엔 호리호리한, 한눈에 보기에도 맑고 선하게 생긴, 그러니까 세상 티끌에 때 묻지 않은 남자가 살았다. 부부 약사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다. 1층엔 조금 전에 말한 보라 아빠가 살았다. 아내와 딸 둘에 아들 하나. 그는 아버지가 운..

너는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너는 너무도 나를 모르는구나 권영상 세상엔 기다리지 않고 되는 일이란 없다. 모두, 시간을 빌어 생겨나고 소멸되기 때문이다. 샘에서 물 한 병을 받으려 해도 물 한 병 크기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배를 타고 섬을 벗어나려 해도 물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야 한다. 세상 이치가 그런 줄 알면서도 가끔은 기다림의 시간에 짓눌려 본심을 잃거나 체통을 버릴 때가 있다. 텃밭에 작물을 심어놓고 기다릴 때도 그렇다. 봄이 기습적으로 마을에 들어와 마을을 마구 변화시키기 시작할 때는 더욱 그렇다. 감자 밭에 감자씨를 넣고 20여일을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다. 마는 심어놓고 무려 55일을 기다려야 한다. 하루가 다르게 들판이 초록으로 변할 때에 55일의 기다림이란 솔직히 고통이다. 그보다 더한 기다림을 요구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