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한 것들
권영상
점심으로 순대국을 먹고 나올 때다.
씨앗가게 앞을 지나던 아내가 길가에 내놓은 씨앗 자루 앞에 앉았다. 종자용 쪽파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씨알이 푸석푸석해 보였다.
“쪽파는 뭣 하러 심으려고!”
나는 아내를 일으켜 세우려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지난해 아내는, 친구한테 얻은 쪽파 한 봉지를 심어 재미 본 경험이 있다.
아내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쪽파 자루 안의 쪽파를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나도 손을 넣어 쪽파를 만져봤다. 서서 본 내 판단과 다름없이 쭉정이에 가까웠다. 알맹이가 있다면 끄트머리쯤에 조그마한 마디 하나가 만져질 뿐 속이 비어있었다.
다음에 사지 뭐, 그 말을 하려는데 아내가 주인에게 얼마예요? 하고 물었다.
“대신 많이 드릴 게요. 8천원이요.” 했다.
주인이 보기에도 발아율이 형편없이 떨어질 거라고 여기는 듯 했다.
결국 검정비닐 봉지로 한 봉지 샀다.
그걸 심은 게 11월 21일, 꼭 열흘 전이다.
그때 기온이 최고 12도, 최저 영하 3도. 그날 텃밭에 삽을 댈 때 표토는 얼어 있었다. 추운 겨울을 날 걸 생각해 퇴비 거름을 충분히 하고 쪽파 씨를 넣은 뒤 춥지 말라고 마른 풀을 골고루 덮어주었다. 그 날 시금치 씨앗도 찬 땅에 뿌렸다.
그 일을 마치고 좀 늦은 감이 있는 칸나를 캤다. 다행히 얼지는 않았다. 수국에 그늘을 만들어주기 위해 그 곁에 심어 놓은 토란도 캤다. 동해를 걱정하여 나무마다 짚싸개를 했고, 마당가 수도는 은박지 보온재로 감싸주었다.
그 후, 겨울 쪽으로 마구 기울어가는 11월 말, 서둘러 안성으로 다시 내려왔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이 무렵의 농촌 모습은 눈에 띄게 급변한다. 나뭇잎은 쓰렁쓰렁할 정도로 다 떨어지고, 길옆에서 피던 코스모스, 백일홍, 마리골드도 서리에 시들어 검게 변했다. 텃밭에 조금씩 남겨두었던 생강과 강황도 그 푸르고 향기 좋던 잎이 서리에 녹았다. 생명 가진 것들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나는 열흘 전에 심어놓은 쪽파와 시금치가 궁금했다.
제일 먼저 쪽파 심은 데로 달려갔다.
놀라운 일이다. 언 땅을 열고 쪽파가 쪽 나와 있었다. 빈 쭉정이인 줄 알았던 쪽파들이 빈 자리 하나 없이 고르게 나와 있었다. 힘없는 것들이 닥쳐오고 있는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 부리처럼 뾰족뾰족 올라왔다. 쪽파 곁에 심은 시금치 씨앗도 힘이 센 일꾼들처럼 쪽 고르게 났다. 초록빛이 사라지고 있는 시절에 초록빛을 살려내고 있었다.
그들은 강하다.
칸나며 토란, 생강, 강황이 추운 땅에서 아늑한 집안으로 들어올 때, 이들은 오히려 멀지 않아 눈 내리는 바깥으로 나가 꽁꽁 언 땅 속에 묻혔다. 그들은 얼마나 용맹한가. 그들은 얼마나 강인한가. 겨울 땅에서 초록빛을 키워낸다.
지난겨울 우리는 쪽파들의 겨울살이를 보며 감동했다. 수선화나 백합 역시 달리아나 글라디올러스와 달리 추운 땅에서 그 본성을 지킨다. 눈 내리는 혹한의 겨울을 맛보아야 꽃 피는 것이 있다. 수국이다. 그는 안온한 겨울철 실내를 완강히 거부한다.
<교차로신문> 2024년 1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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