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수능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권영상 2023. 11. 16. 11:26

 

 

 

수능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권영상

 

 

 

목요일인 오늘, 수능일이다.

수능 수험생들이라면 지금쯤 수험장에서 문제 풀이에 몰두하고 있겠다. 이른 아침 집을 떠나와 제 시간에 도착한 학생들이 대부분이겠다. 그러나 멀쩡히 가던 길도 이런 날이면 버스를 잘못 타거나 역방향으로 전철을 타고 갈 때가 있다. 가다가 ‘어,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허겁지겁 전철을 바꾸어 타거나 택시를 잡아타고 온 학생도 있을 테다.

 

 

전철이나 버스를 바꾸어 타고 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오늘 시험 꽝이겠구나’, ‘대학은 내년에나 가자,’ 그러지는 않았을까. 어쩌면 긴장이 풀리는 자신을 비난했을지 모른다. 도대체, 꼭 이런 순간에 왜 이러는 거야! 하고.

어쨌든 지금쯤은 벌렁거리던 가슴을 진정시키고 평온한 마음을 되찾았기를 바란다.

 

 

예비고사를 보던 시절,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나는 수험장이 있는 곳에서 10여리 떨어진 시골에 살았다. 마을로 들어오는 버스라곤 아침 점심 저녁 하루에 세 번. 첫 버스를 타기 위해 추운 정류장에 나가 섰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택시도 흔하지 않던 때였다.

다급해진 나는 가방을 버리고 4킬로미터를 달렸다.

 

 

그 촌스러운 용맹함 덕분에 무사히 수험장에 도착했다.

그때니까 그랬다. 수능일과 상관없이 버스는 무단히 오지 않을 수 있고, 택시를 불러도 멀다고 거부할 수 있고, 긴장했으니까 4킬로미터를 단숨에 주파할 수 있었다.

땀범벅인 나는 차츰 안정되어 가는 마음으로 시험을 봤다.

시험이 끝나자, 가까운 친구들과 가볍게 술 한 잔을 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선배들이 시험 보느라 애썼는데 술 한 잔 해야지 하며 술을 권했다. 모두 그때니까 가능했다.

 

 

다들 시험 잘 치르기를 바란다. 물론 공부한 것 이상으로 성적이 잘 나오길 바란다. 공부를 많이 했건 안 했건 선다형이란 찍어놓고 보면 정답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다. 그런 까닭에 누구는 예상치 못하게 높은 점수를 얻고, 누구는 티나게 적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공부한 것 이상의 성적이란 운이 관여한 성적으로 우리는 그 성적까지 탐한다.

우리는 운을 믿는다.

 

 

‘수능 대박!’ 그 말속에도 운이 깃들어 있다. ‘펜이 가는 곳이 정답이 되게 하소서!’, ‘찍는 것마다 정답!’, ‘그대 눈에는 정답만 보인다!’ 수능 때마다 인터넷에 나도는 이런 수험생을 위한 격려 문구도 그렇다. 답을 선택하는 데 운이 작용한다는 말이다. 5지 선다형에서는 더욱 그렇다. 운은 무슨? 하지만 운은 과거시험에도 있었다.

대체로 인생이란 그렇다. 보이지 않는 힘의 작용을 받는다. 그걸 운이라 할 수 있고, 운을 믿지 않는다면 우연이라 할 수 있다. 수능이라고 뭐가 다를까. 운이 좋아 다들 생각보다 좋은 점수를 받았으면 좋겠다.

 

 

모든 건 운이다. 시험이 끝나거든 좀 홀가분해지자.

‘수능 잘 보고 2호선 타’기 보다 평소에 보아왔던 좋은 카페에 들러 친구랑 커피 한잔을 마시거나 좋은 영화 한편을 골라 보는 여유를 누려보자. 이런 날 평소에 못 찾아 뵌 그분에게 전화를 드리거나 벼르던 책을 꺼내어 마음의 휴식을 즐겨보자. 다른 날도 아닌 이런 날, 나는 몰라보게 조용히 성숙한다.

5시 50분쯤, 추워지는 초겨울 오후, 다들 손을 털고 교문을 나서고 있겠다.

 

<교차로신문> 2023년 11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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