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지갑을 잃어버렸다

권영상 2023. 11. 9. 20:11

 

지갑을 잃어버렸다

권영상

 

 

 

지갑을 잃어버렸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끝낸 뒤에야 알았다.

오후 2시쯤 가을 나들이 겸 차를 몰아 30분 거리에 있는 고찰에 갔었다. 지난해에도 갔었지만 그 절의 불타는 듯한 단풍과 잘 단장해 놓은 가을꽃 풍치가 그리웠다. 무엇보다 그 댁 부처님과 주렁주렁 달려 있을 감나무 감들이 눈에 선했다.

노란 은행나무 길 끝의 일주문을 들어서고, 천왕문을 들어서고, 가벼이 대웅전에 들어가 부처님을 뵙고, 절마당 벤치에 앉아 이울어가는 가을 소풍을 즐겼다. 그때 가을꽃 곁에 앉아 꽃들과 놀았는데 그 사이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지갑이 빠져 나간 모양이었다.

 

 

절에다 지갑을 떨어뜨리고 온 것 같아.”

나는 결국 아내에게 그 말을 했다.

걱정 말어. 절에서 잃어버렸으니 부처님이 잘 돌보고 계시겠지.”

여느 때 같으면 당신 못 말리겠다!’, ‘당신 정말 왜 그래?’, ‘벌써 지갑 잃어버린 게 몇 번째야!’ 그러며 성을 낼 아내가 내일 가 보자며 내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지갑을 잃어버린 밤은 길고 길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편안하지 못한 내 마음처럼 안개가 자옥했다. 점심 무렵부터 비 온다는 소식도 있어 급한 대로 사다리를 지붕에 걸쳐놓고 추녀 물받이를 확인했다.

가을비가 내리면 창밖 산딸나무 낙엽도 추적추적 떨어져 추녀 끝 물받이 홈통을 막아버린다. 요 이태 전이다. 막힌 홈통에 까마중이가 글버딛고 자라 물길을 막은 적이 있었다. 그때 물받이 청소를 하고 내려오며 까마중이가 어떻게 추녀까지 올라갔을까, 그랬다.

 

 

오늘 아침 역시, 물받이에 떨어진 낙엽을 치우고 나자, 그 밑에 초록 보석 같은 까마중이 여남은 알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했으나 그 주범은 새들이었다. 동네 작은 새들이 까마중이를 따 물고 지붕에 앉아 놀다가 깜빡 잊었거나 놓친 게 분명했다.

새들도 나처럼 제 수중의 걸 곧잘 잃어버린다.

 

 

뜰앞 보리수가 빨갛게 익을 때면 동네 새들이 알고 보리수나무 속을 드나든다. 가끔 방에서 일을 하다가 바깥에 나와 보면 데크 난간 위에 빨간 보석 같은 보리수 열매 한두 개가 놓여 있다. 수돗가에 가보면 수돗가에도 금방 씻어놓은 듯 빨간 보석들이 놓여 있다.

맛 좀 보라고 새들이 놓아두고 간 모양이구먼.’

나는 새들의 기특함을 칭찬해 주지만 새들이 그런 마음을 가질 리 없다. 먹으려고 여기까지 물고 와 앉았다가 그만 깜빡 잊고 날아간 것이다.

 

 

안개가 걷힐 무렵, 차를 몰아 어제 그 고찰에 도착하여 내가 다녔던 곳을 더듬어 봤지만 지갑은 없었다. 아내가 종무소에 가 알아보겠다며 그리로 갔다.

그러지 말어. 부끄럽다고. 지갑에 집착하는 것 같아서.”

아내는 믿는 데가 있는지 종무소를 찾아갔고, 돌아온 아내의 손에 내 지갑이 들려있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하고.

내 말이 맞지? 절에서 잃어버렸으니 당연히 절에서 잘 돌보아주실 거라는 내 말.“

아내가 지갑을 내 바지 앞주머니에 찔러넣어 주었다.

오늘, 고찰이 내게 보여준 이 보석 같은 신의를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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