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감잎 가을 선물

권영상 2023. 10. 24. 11:44

 

감잎 가을 선물

권영상

 

 

아내가 참여한 미술전이 끝났다.

작품을 회수해 온 아내가 선물이라며 전시작품 도록을 내밀었다. 전시장이 코앞인 데도 못 가봤다. 예상치 못한 독감에 걸렸다. 날마다 아침에는 8시에 산에 오르고, 밤에는 9시에 걷기 길에 올라 한 시간을 걷는다. 딴엔 그걸 커다란 운동이라 믿어선지 병원에 안 가고 지금 닷새를 버티고 있는 중이다.

“잘 찾아봐. 당신에게 줄 가을 선물을 숨겨놨어!”

그제야 나는 책갈피에 삐죽 나온 가을 빛깔을 쏙 잡아당겼다.

 

 

빨갛게 익은 감잎 두 장이 나왔다.

순간 예술의 전당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들이 떠올랐고, 이 감잎은 그들의 가을 분신임을 알았다. 들여다 볼수록 가을이 곱다.

감잎을 만져보는 손끝이 촉촉하다. 가을물이 손끝에 묻어날 것만 같다. 감잎이 만들어내는 빛깔이란 이처럼 깊다. 강렬하다. 더구나 그 안에 아련히 고향의 가을도 깃들어 있다.

 

 

아버지는 고향집 뜰안에 감나무를 두는 게 소원이셨다.

아버지가 분가해 나오시기 전, 어린 시절을 사셨던 아버지의 집엔. 그러니까 내게로 볼 때 큰댁엔 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었다. 물론 지금도 있다. 오래된 대봉시나무 한 그루와 반시 세 그루다.  감나무는 크고 높았고, 그 그늘은 넓었다. 여름이면 거기 그늘에 모여 놀거나, 낮잠을 자거나, 누군가를 오래 기다리며 하모니카를 불거나 했다.

 

 

감이 익을 때의 풍광은 얼마나 멋진가. 커다란 감나무에 주렁주렁 붉은 감이 매달린 감나무는 가을 그 자체다. 누구라도 그런 나무 앞에 서면 아, 가을이구나! 감탄한다.  탐스럽기 때문이다. 한여름을 견뎌낸 나의 노고를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떨어진  감잎으로 감잎 모자를 만들어 쓰던 일도 가을 감나무 밑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풍광이다.

아버지에게도 그런 추억이 있었겠다. 말수가 적고 엄하기만한 아버지라 해도 왜 어린 시절의 감나무에 얽힌 아버지만의 애틋한 추억이나 그리움이 없었겠나. 우리는 아버지는 엄하실 뿐 그런 감정이 아예 없는 줄 알았다.

 

 

어떤 추억 때문이셨을까. 아버지는 감나무 대목인 고욤나무를 뜰안 여기저기 심으셨다. 그러시고는 봄이 되면 감 접 잘 하시는 분을 모시고 와 접을 부탁드렸다.

근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번번이 실패였다. 막내인 내가 알기에도 여러 해 그랬다.

그 후, 나는 결혼하여 분가 했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서 살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어느 해, 고향집 뜰안에 감나무가 크는 걸 봤다. 큰조카가 한 그루 사다 심었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소원이시던 감나무를 보지 못하고 가신 거였다.

 

 

아버지에게도 감나무 아래에서 누군가를 한없이 기다리거나 그가 그리워 홀로 외로워 하신 추억이 있었을 텐데. 혹시 그런 기억 때문에 감나무를 가지고 싶어 하신 건 아닐까.

퇴직을 하고 안성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한 뒤 떠오른 나무가 감나무였다. 겨울 기온이 낮아 감나무 키우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도 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해마다 겨울이면 동해를 입을까봐 보온 테이프로 감싸주며 애지중지 키운 덕에 지지난 해에 감 4개를 땄다. 아니, 아버지의 그리움 4개를 따드렸다.

 

 

올해는 냉해를 입어 꽃도 못 피워 보고 저렇게 가지와 잎만 무성하다. 감은 틀렸다 하더라도 지금 아내가 들고 들어온 가을 선물처럼 고운 감잎쯤은 보여주겠다. 빨갛게 익은 감잎 선물이야 누군들 좋아하지 않겠나.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시겠다.

 

<교차로신문> 2023년 11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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