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가을이 익고 있다

권영상 2023. 10. 7. 15:40

가을이 익고 있다

권영상

 

 

 

서울행 버스정류장에 아내를 내려주고, 나는 마트 앞에 차를 댔다. 식품 몇 가지를 사 가지고 차에 오르려다 다시 내렸다. 가을볕이 너무 좋아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 아쉬웠다.

차를 두고, 가까이에 있는 개울을 향했다. 청미천이다. 개울 안에 시멘트로 만든 다리가 있다. 징검다리처럼 나트막하다. 노란 갈볕을 받으며 그 다리를 건너고 싶었다. 천변 양켠에 무성하게 자란 갈숲. 갈숲 안쪽에 펀하게 개울물이 흐른다.

 

 

다리를 건넌다. 그제야 못 듣던 개울물 소리가 철철철 요란하다. 발을 멈춘다. 물소리를 듣는다. 머릿속이 물소리처럼 철철철 살아나는 느낌이다. 웬만한 개울에서 들을 수 없는 큰 물소리다.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가을볕이 쏟아져 반짝인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개울바닥이 온통 굵은 돌들이다. 물은 거기 돌에 부딪혀 휘돌면서 섬 아닌 섬들을 기룸하게 개울바닥에 만들어냈다. 그 위에 자라난 풀들이 젖은 머리를 뒤로 빗어넘긴 모습이다. 섬과 섬들을 비키느라 물은 콸콸콸, 또는 철철철, 또는 쿨쿨쿨 소리치며, 꼬리치며, 까불대며 흘러간다. 다리에 걸터앉는다. 신발이 물살에 닿을락 말락한다.

 

 

흔들리는 물속에 한 사내가 있다.

그를 골똘히 들여다본다. 그도 나를 골똘히 올려다본다. 그의 얼굴에 세월의 나이가 얹혀있다.

‘쭈욱 이대로 건강했으면 좋겠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아니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그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가을이란 좋다. 이만한 나이에 개울가 다리에 혼자 앉아 개울물을 들여다보고, 실없는 이야기를 하고, 그럴 수 있는 것도 조락하는 가을 때문이지 싶다.

 

 

개울이 흘러오는 상류 쪽으로 돌아선다.

말이 개울이지 명색이 청미천이다. 크고 넓다. 마치 온후한 강물처럼 개울 양안의 풀숲을 열고 유유히 흘러온다. 그쪽 빌딩이며,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이며, 마을 집들이 우련하게 비친다. 물은 저렇게 제 품에 안기는 하늘이며 구름이며 낮달까지 거절하지 않는다. 나트막한 개울다리를 건너 개울둑에 올라섰다.

 

 

이 동네 고등학교 4층 건물이 눈앞에 떡 버티고 서 있다. 학교 앞은 운동장이 아니라 누렇게 벼가 익는 논벌이다. 저 학교 아이들은 지금 잘 익는 벼를 보며 벼처럼 공부하고 있겠다. 공부하다가 힘들면 누런 논벌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성숙한 가을을 만들기도 하겠다.

논벌을 향해 따라난 낮은 길로 내려선다.

볕 좋은 논둑길엔 온통 노란 뚱딴지 꽃이다. 누가 심지도 않았을 이 길가에 서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꽃 피고 있다.

 

 

그들이 마주하고 선 넓은 논벌은 옛말 그대로 황금들녘이다. 눈부시다. 지나가는 분에게 논벌 이름을 물었다. 새보들이라 했다. 청미천 어딘가에 새로이 보를 만들고 그 물로 이 들판을 키운다는 이름이 아닐까. 좀 전에 본 4층 높이의 우람한 고등학교 건물이 떠오른다. 이 작은 마을에 그만한 학교가 있는 것도 어찌보면 이 기름지고 풍요한 새보들 때문일 것 같다.

 

 

휴대폰 카메라로 황금들녘을 찍으며 여유롭게 논길을 따라 걷는다. 갈볕에 겉옷을 벗어 어깨에 걸친다. 누런 벼이삭을 손에 쥐어 본다. 탈곡을 마친 볏짚을 두 손으로 한껏 움켜잡아 본다. 그러다가 저 멀리 굴암산 그늘을 바라보며 돌아선다.

가을이 황금빛으로 익고 있다.

 

교차로신문 2023년 10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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