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무지개 떴다
권영상
아침에 그친 비가 점심 무렵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엔 비가 좀 부족하다 해야 하는데 어찌된 건지 여름부터 비가 많다. 온다던 태풍이 오지 않았을 뿐, 가을비는 무더기비처럼 거세게 내린다.
날이 좀 들 것 같아 대파밭 북을 주고 돌아서면 놀리듯이 비가 내렸다. 고랑에서 긁어올린 흙 속 유기물을 비가 씻어내리는 것도 문제지만 비에 파밭골이 무너진 걸 보면 남루하다. 주인 없는 밭 같아 비가 뜸하면 또 비 올 줄 알면서도 파밭의 북을 준다.
오후 늦게 비가 뜸하자, 나는 괭이를 들고 또 파밭에 들어섰다.
파밭이래 봐야 모두 여섯 골. 김장 파 넉넉히 드리겠다고 벌써 여기저기에 말해 뒀다. 지난해는 파 농사가 잘 돼 파를 나누어 드리는 내 마음이 뿌듯했다. 물론 그때에도 나는‘내년에도 기대해 보세요’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파밭에 북을 넉넉히 주면 대파의 흰색 부분이 많아져 좋다.
불과 여섯 골 밖에 안 되는 대파를 위해 오늘도 안성으로 내려왔다. 볼수록 파가 작년 같지 않다. 강한 초록빛을 풍기지 못하고 어째 희끗희끗하다.
나는 가는 비 맞을 작정을 하고 파밭에 들어서서 괭이질을 했다.서쪽 하늘은 펀해지며 날이 드는데 머리 위 하늘에선 부슬부슬 비 온다. 이 정도 비쯤이야 오히려 맞는 게 좋다. 흙을 긁어올리다가 가끔 허리를 편다. 웃옷에 내려앉은 빗방울을 툭툭 털고는 다시 일 한다. 잔비라서 옷에 스미지도 않는다.
그렇게 서너 골 북을 주다가 허리를 펼 때다.
건너편 동쪽 하늘에 파랗게 무지개가 떴다.
세상일에 무심한 내 가슴이 다 뛴다. 나는 괭이자루를 세워 짚고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 무지개를 쳐다본다. 무지개가 너무 커 그들이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을 짐작하지 못하겠다. 엷은 무지개가 바라볼수록 점점 진하고 또렷해진다.
“야! 무지개 떴다!”
이웃 담장 너머에서 누군가 소리친다.
그분도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부슬부슬 내리던 잔비도 벌써 그쳤다.
지금 저 무지개 아래 사는 사람들이라면 창가에서, 또는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파랗게 뜬 무지개를 보고 있겠다. 사람들만이 아니다. 비 그칠 때를 알고 무지개를 기다려온 달팽이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 여뀌나 달개비 풀가지에 올라앉아 무지개를 보고 있겠다. 벌레를 잡던 밭개구리들, 새앙쥐들, 풀잎 뒤에서 비를 피하던 나비들, 모두 잠시 손을 놓고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겠다. 모처럼 다들 마음이 맞아 하나의 방향으로 서 있는 오후다.
나는 그쯤에서 괭이를 잡고 하던 일을 마저 한다.
맨발로 일하는 발밑으로 땅의 기운이 밀려오는 듯 몸이 서늘하다.
가끔 가끔 돌아서서 무지개를 쳐다본다. 희미하지만 이쪽에 무지개 하나가 또 섰다. 가을 쌍무지개다. 흙을 밟고 이렇게 무지개를 본지 오래다. 고향을 떠나온 이후로 밤하늘 은하수며 무지개며 반딧불이며 우렁이며 나무를 잘 타던 담비들, 모두 잊고 산지 오래다.
무지개가 천천히 사라진다.
사라지는 무지개를 보면 허전하다. 어린 시절, 마음에 품었던,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놓치는 것 같아 아쉽다. 무지개를 보면 허둥지둥 마당을 나와 둥근 무지개 하늘 문을 향해 뛰어가던 나의 순수한 시절이 사라지는 것 같아 서럽다.
<교차로 신문> 2023년 10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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