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버리고 싶은 이름

권영상 2023. 9. 24. 10:16

 

버리고 싶은 이름들

권영상

 

 

 

짬 좀 내어 논벌에 나가 봐야지, 했는데 여태껏 그 일을 못했다. 집에서 조금만 나가면 벼가 익는 논벌이다. 그런데도 뭐가 바쁜지 내일, 내일, 하다가 오늘에야 틈을 냈다. 요기 대여섯 집을 지나면 언덕이 나오고 언덕을 넘으면 논벌인 벽장골이 펼쳐진다.

신발 끈을 조일 겸 따가운 가을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들어섰다. 거기 앉아 풀린 운동화를 조이고 일어서며 보니 나를 가려준 나무가 뽕나무다. 논벌을 내다보는 밭둑에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 가끔 이 길을 지나다녔지만 여기에 뽕나무가 서 있는 줄은 몰랐다.

 

 

괜히 뽕나무를 한 바퀴 빙 돌아본다.

예전 딸아이가 어렸을 때다. 나무만 보면 아빠랍시고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던 때가 있었다. 밭 가생이에 선 뽕나무를 보자, 이게 뽕나무다, 하고 알려주었다. 그때 딸아이는 지금의 나처럼 뽕나무 주위를 천천히 돌며 나무 둥치를 유심히 살폈다.

“아빠, 이 뽕나무 어디로 방귀 뽕 뀌지?”

딸아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뽕나무라는 말에 딸아이는 뽕나무 어딘가에 엉덩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디로 뀌나 보자, 하고 딸아이와 살곰살곰 뽕나무를 돌던 기억이 있다.

그때 뽕나무가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부끄러워 몸을 배배 꼬았을지 모른다. 어떤 연유로 뽕나무라는 이름이 지어졌는지 모르지만 유머 있는 이름이긴 하다.

 

 

근데 이 이름은 좀 어떨까.

집 경계에 소나무 여러 그루가 있었다. 봄이면 송홧가루 피해가 심해 대체 나무를 구하기로 했다. 홍가시나무가 좋겠다 싶어 나무시장에 갔는데 추위에 약한 나무라고 했다. 나는 함께 간 아내에게 그럼, 쥐똥나무는 어떨까, 하고 물었다.

어느 화장품 회사 울담에 잘 가꾼 쥐똥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아파트에도 일부 쥐똥나무 울담이 있어 아내의 의향을 물었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쥐똥나무라니!”

많고 많은 나무 중에 하필 쥐똥나무냐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왜? 하고 되물었고, 아내는 이름이 싫다는 거였다.

쥐똥나무가 뭐야? 기분이 안 좋아. 부를 때마다 쥐똥이라니.

누가 지었을까. 쥐똥나무.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무의 심정은 어떨까.

 

 

쥐똥나무 묘목을 지나며 떠올린 게 있었다. 댕강나무다.

잘 아는 동화작가로부터 추천받은 울담나무다. 꽃도 잔잔하고 꽃향기도 섬백리향처럼 은은히 번지는, 울담하기에 괜찮은 나무라 했고, 나도 보았다.

아내는 그 나무에도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 나무이름을 꺼낸 나도 마뜩찮았었다.

댕강나무라니! 어감도 안 좋고, 부르기가 좀 섬뜩했다.

따뜻한 지방에나 산다는 홍가시나무에 자꾸 마음이 갔다. 홍가시나무. 부르기도 좋고, 괜히 좀 부유해지는 느낌도 있고, 잎이 붉고 둥근, 왠지 넉넉한 나무 이름이 자꾸 좋아졌다.

 

 

결국 고향 이웃집에서 보던 사철나무 서른 그루를 차에 싣고 돌아오며 혐오감을 주는 나무며 풀이름을 아내와 함께 주거니 받거니 했다.

개불알꽃이 그렇다. 부르기는 재미있지만 그 이름을 듣는 꽃의 기분은 어떨까. 며느리밑씻개, 개똥쑥, 등골나물, 마귀광대버섯, 미치광이풀, 작살나무…….

사람 이름이라면 법을 통해 바꿀 수 있지만 식물 이름은 어떤 법으로 바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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