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유산
권영상
지난 금요일, 종로 5가 씨앗가게에서 칸나 두 뿌리를 샀습니다. 꽃이 빨간 칸나와 노란 것을 한 뿌리씩 샀지요. 그걸 마당 가운데에 심었습니다. 이들이 잘 커서 푸른 그늘을 만들고, 풍선의 돛처럼 바람을 받아들이고, 빗소리에 민감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보름쯤 지나면 새움이 나올 테고, 5월이 오면 큰 잎을 펼치며 쑥쑥 자라주겠지요.
집에 들어가기 전에 꽃씨 온상도 한번 들여다 봤습니다. 뿌린 지 꼭 일 주일 만인데 어김없이 파랗게 돋았습니다. 해바라기, 백일홍, 채송화, 프렌치 메리골드 그리고 상추씨도 한 줄 뿌렸는데 모두 잘 났습니다. 좀 성가셔도 해마다 온상에다 모종을 키워서 4월 중순쯤 비 오는 날을 골라 밖에다 냈습니다. 비닐을 꼭꼭 덮어주고 거실에 들어설 때입니다.
“당신 책상 서랍에서 목화씨 나왔어!”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가 식탁을 가리킵니다.
거기 흰 솜이 붙어 있는 목화 씨앗 세 개!
목화 씨앗은 저를 감쌌던 휴지 조각 위에 놓여 있습니다. 자를 찾느라 서랍을 뒤지다 이제는 쓰지 않는 필통 속에서 발견했답니다. 나는 이 갑작스런 목화 씨앗의 출현에 놀랐습니다. 봉숭아나 접시꽃 씨앗이라면 아, 꽃씨! 하고 말겠지만 상대가 목화 씨앗이고 보니 마음의 울림이 일어났습니다.
어디서 난 씨앗일까? 나는 그 생각부터 했지요. 목화는 구청, 원예 꽃밭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서해안 어느 수목원에서도 본 기억이 있지요. 그러나 거기서 구해올 리는 없습니다.
“그래. 어머니가 주신 거구나!”
저녁 수저를 놓을 때쯤 문득 그 목화씨의 정체가 떠올랐습니다. 이웃동네 아시는 분 집에 들렀는데 그 댁 마당에 핀 탐스런 목화를 보고 씨앗 세 개를 얻어 왔다고 했었지요. 그때 어머니는 그걸 심어 솜버선을 만들려고 하셨다면서 그 무렵 고향을 찾은 내게 주셨습니다.
나는 식탁 옆에 밀어둔 목화 씨앗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어머니가 가신지 벌써 10년도 더 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목화 씨앗 세 개는 10여년 만에 펼쳐보는 어머니의 유산인 셈입니다. 불현 내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 씨앗 속 좁은 방에 어머니가 앉아계실 것 같습니다. 나는 마치 어머니의 숨결을 느끼려는 듯이 씨앗을 귀에 대어보고, 또 손으로 꼭 움켜잡아 봅니다. 목화솜에 감싸여 있어 그런지, 아니면 어머니의 아득히 남아있는 체온 때문인지 손안이 따스합니다.
목화솜으로 솜버선을 만드시겠다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여름에도 두툼한 머릿수건을 쓰셔야할 만큼 바람을 타셨습니다. 양말 대신 솜버선을 생각하신 것도 발에 바람이 들어 그러셨던 건 아닐까요? 오랫동안 어머니를 잊고 살았는데, 이 목화 씨앗 세 개가 다시 어머니를 생각하게 합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꽃씨 온상의 빈자리에 이 목화 씨앗을 심어야지, 하면서도 걱정이 앞섭니다. 10년도 더 지난 이 씨앗 속에 목화의 숨결이 남아있긴 할까요?
“천 년을 잠자던 연꽃 씨앗이 살아났단 소식 어디선가 들었어.”
아내가 내 걱정을 덜어주려고 한 마디 합니다. 나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떻든지 잘 키워서 솜버선은 못 만들어도 솜방석만은 하나 만들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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