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꼬드기는 봄꽃 화분
권영상
오늘이 이웃마을 장날이다. 씨토란도 구해볼 겸 집을 나섰다. 올해엔 토란을 꼭 좀 심어보고 싶다. 알토란도 알토란이지만 토란잎에 구르는 빗방울이 보고 싶고, 굵고 유연한 잎무늬가 보고 싶다. 마침 장터에 나가 순대국밥도 한 그릇 사 먹고, 또 왁자지껄한 장터 풍경도 볼 겸, 정말 겸사겸사 장터로 향했다.
봄이 가까워오는 장날이라 장터가 북적댄다. 좀 먼데다 차를 세워놓고 장터에 들어섰다. 처음부터 나를 막아서는 건 값싸고 잘 생긴 옷들이다. 몇 벌 사 입고 싶을 만큼 옷들이 좋다. 또 곡물 좌판이 보인다. 그 곁에 숱한 쟁기들도 나왔다. 잠깐 서서 먹어도 좋을 음식들을 지나 내가 멈춘 곳은 생미역 앞이다. 끓는 물속에 살짝 데치면 금방 파래지는, 마술 같은 생미역 두 묶음을 샀다. 검정콩을 사고, 끝이 닳은 호미 대신 새 호미를 사고, 밤 깎는 손기계도 샀다.
“씨토란은 아직 안 나오나요?”
나는 마늘 파는 수더분한 아저씨에게 물었다.
씨토란은 4월초 씨감자 심을 때가 파종 적기이니 그때에 여기 나오면 쉽게 살 거라고 일러준다. 이제 장날 첫 볼일은 본 셈이다. 토란을 사러 나온 게 아니라 4월쯤 여기 나오면 씨토란을 구할 수 있다는 이 말, 이 말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오늘 장터에 나온 거다. 이제 그걸 확인했으니 마음이 홀가분하다.
순대국밥 집을 찾아가는데 내 눈을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봄꽃이다. 분양 중인 햇강아지 곁 널찍한 터에 온갖 꽃화분들이 나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꽃이 노랑 수선화다. 마치 살찐 게처럼 엉금엉금 기어가는 듯한 알뿌리 위에 활짝 핀 노랑 봄. 그 뒤에 하양 보라 노랑꽃이 좋은 칼라 화분, 그 곁에 꽃망울이 볼록한 붉은 철쭉, 그 앞자리에 보라색 라벤더, 미니 호접란도 있다.
나는 프리지아 화분 앞에 앉았다. 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인다. 얼마지요? 하고 물어보는 내 눈에 노랑 팬지 화분이 보인다. 꽃화분 주인이 ‘5천원이요!’ 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눈길은 그 너머 분홍 시클라멘을 향했다. 이걸로 주세요! 하는 내 말에 나를 지켜보고 섰던 주인 사내가 시클라멘을 집으려 허리를 숙이는 사이, 내 마음이 또 변했다. 히아신스다. 그걸 보는 순간 내 몸 안으로 히아신스 향기가 확 밀려드는 느낌이다. 나는 하양 히아신스 화분을 집어들었다.
“미안합니다, 진짜 이걸로 주세요.”
요랬다조랬다 하는 나를 보고 주인사내가 웃으며 내가 내민 화분을 받는다. “봄꽃 앞에 앉으면 사람 마음이 다 그래요. 다 갖고 싶거든요.”한다. 무안해 하는 내 마음을 그렇게 편들어 준다. 봄꽃 향기에 흠뻑 젖은 사람처럼 마음이 푸근하다.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에 다시 꽃 마당에 들러 팬지 화분을 하나 더 샀다. 아무래도 봄꽃이라면 노란 팬지다. 비록 향기는 없지만 노란 색 팬지만큼 사람 마음을 흔드는 봄꽃도 없다.
이틀을 밤골에 더 머물다 서울로 올라왔다. 와 보니 나 없는 사이에 아내도 꽃을 샀다. 베란다에 수선화와 히아신스가 와 있다. 나와 똑 같은 하양 히아신스다. 길에 내놓고 파는 봄꽃이 마음을 꼬드겨 어쩔 수 없었다는 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이쯤에서 봄꽃을 만나면 누구나 집으로 데려오고 싶은 유혹을 느낄 테다. 비록 작은 꽃이어도 이들이 사람 마음을 붙잡았다 놓았다 한다. 햇봄은 큰 식물에서 느끼는 게 아니다. 쪼꼬마한 화분 속 앙증맞게 핀 꽃들이 사람을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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