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행
권영상
아파트 뒷길에 하얀 캠핑 트레일러가 몇 달째 서 있습니다. 지붕이 타원처럼 둥글고, 창문은 양옆과 뒤쪽에 하나씩 나 있지요. 그 곁을 지날 때면 괜스레 나도 캠핑 트레일러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그 생각을 하곤 합니다.
“봄도 오는데 우리도 어디 여행 갈까?”
추위가 한풀 꺾여가는 어느 날, 아내에게 불쑥 그 말을 했습니다.
내 말에 아내가 ‘우리도 라니? 누가 봄 여행을 가는데?’하고 물었지요. 나는 길에서 본 그 눈부시도록 하얀 캠핑 트레일러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한가한 여행 타령이냐던 아내가 그날부터입니다.
컴퓨터를 켜고 앉아 여행할만한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한려수도 어때? 충무에서 여수로 가는 봄바다 여행!”
아내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또 물었지요.
“한려수도가 그렇다면 통영바다는? 돌아다니지 말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싫도록 바다를 보고 오는 거야. 어때?”
그러더니 동백꽃이 좋다는 남해의 어느 섬을 들먹였지요. 가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고, 그냥 가봤으면 하는 남쪽의 어느 바다를 주워섬기는 듯 했습니다.
근데 아내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괜히 좀 미안해졌습니다. 가보고 싶다는 그 곳 여행을 못 시켜주는 내가 딱했습니다.
그 며칠 뒤 나는 마음을 먹고 아내를 불렀지요.
“말 나온 김에 우리 통영 바다 보고오자. 케이티엑스타고.”
그쪽으로 아주 모든 결론을 낸 것처럼 나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통영은 무슨.”
아내는 그냥 해 본 말이라며 물러섰습니다.
요 며칠 사이 창밖으로 내리는 햇빛에 봄이 묻어있습니다. 바깥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고 해도 봄빛은 봄빛입니다. 마음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거실 문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가 다시 컴퓨터 앞에 앉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해외여행 하고 싶은 나라 없어?”
컴퓨터 앞에 눌러앉던 아내가 늦은 밤 불쑥 그걸 물었지요. 나는 지난번 아내가 내게 했듯이 “해외여행은 또 무슨 해외여행!” 하고 웃어넘겼지요.
“베트남 다낭 어때? 당신 안 가봤잖아.” 아내가 물었습니다. “미얀마도 미개척지라 괜찮다던데.” 그러더니 “운남성의 다리 고성은? 영화 ‘호우시절’에 나온 두보초당도 볼만하다는데.” 그러더니 또 인도의 뭄바이와 인도 남부의 고아를 들먹입니다.
“아, 스페인!”
한참 만에 아내는 결단을 내린 듯 스페인을 외쳤습니다.
거기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똘레도 세빌리아 그라나다를 열거합니다. 그냥 듣고만 있어도 군침이 도는, 정말 한번은 가보고 싶은 도시들입니다. 안 가면 혼자라도 가겠다는 아내의 말은 단호했지요.
비용이 많이 들 텐데, 하며 한발 물러서긴 했지만 속으론 말로만 한번 해보는 여행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아내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스페인까지 14시간이나 걸린다며 나이 더 먹기 전에 가야한다느니 피카소 미술관 달리 미술관을 자꾸 들먹입니다. 뭔 일이 나도 날 것 같습니다.
괜히 시작해놓은 봄 여행이 이렇게 번질 줄은 정말 몰랐네요.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봄바다가 들려주는 노래 (0) | 2017.03.17 |
---|---|
나를 꼬드기는 봄꽃 화분 (0) | 2017.03.05 |
고갯마루 학교 (0) | 2017.02.25 |
혹독한 겨울의 의미 (0) | 2017.02.25 |
늙은 호박을 위한 명상 (0) | 2017.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