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겨울의 의미
권영상
텃밭에 묻어둔 대파 두엇을 뽑으러 나왔지요. 풀릴 듯 하던 기온이 또 다시 내려가네요. 코 끝이 싸늘합니다. 지난 해 김장에 쓰고 남은, 꽤 많은 대파는 길다랗게 구덩이를 파고 반쯤 묻어두었지요. 기껏 그러고 말았는데 파는 한겨울 눈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습니다.
나는 파 세 개를 뽑아 겉껍질을 벗겨 봅니다. 이럴 때마다 참 이상하고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껍질을 벗길 수 없을 만큼 파가 꽁꽁 얼어있다는 것입니다. 속살까지 얼음조각처럼 얼어 있습니다. 파는 이런 상태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한겨울 텃밭에서 푸른 빛을 잃지않고 내뿜습니다.
그뿐이 아니지요. 이윽고 봄이 오면 꽃대를 밀어올려 주먹만큼 실한 파꽃을 피우고, 검고 튼실한 파씨를 익힙니다. 해마다 경험하는 일이지만 대파에게 있어 겨울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겨울은 그에게 어떤 작용을 하기에 그런 경이로운 일을 하는 걸까요.
방에 들어와 아내에게 파를 넘기고 씨앗상자를 꺼냅니다. 지난해에 받아놓은 상추며 쑥갓 씨앗, 도라지, 겨자, 대파 씨앗, 호박, 오이, 가지 씨앗 봉지를 살핍니다. 봄이 멀지 않았습니다. 2월이 가면 꽃씨 온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꽃씨 온상에 쓸 씨앗으로 프렌치 메리골드, 과꽃, 백일홍, 샐비아, 채송화, 맨드라미, 그리고 작약을 준비했습니다.
작약도 참 이해할 수 없는 씨앗이지요. 지금 꽃씨 상자에 들어있는 작약 씨앗은 언젠가 강릉의 허균 생가 뜰에 떨어진 10여 개 주워온 것이지요. 작약은 꽃도 멋스럽지만 씨앗도 굵고 탐스러워 꽃을 피워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합니다.
요 몇해 전부터 꽃씨 온상을 만들 때면 작약 씨앗을 한 줄씩 심었지요. 그때 함께 심은 것 중에 붓꽃 씨앗도 있었지요. 근데 놀라운 건 다른 씨앗은 다 발아해도 작약과 붓꽃만은 발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씨앗에 문제가 있거니 했었는데 그 까닭을 올해에야 알았지요.
그들 씨앗은 노지에서 겨울을 나지 않으면 발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겨울은 씨앗에게 어떤 의미이길래 그럴까요. 6년간의 동면을 끝내야 어른 대나무로 커버리는, 그것도 단 한 달만에 다 커버리는 죽순을 보면 길고 혹독한 동면이 단순한 휴면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겨울은 씨앗들에게 있어 단 시간에 생명을 분출시키는 힘을 축적하는 침묵기인 듯 합니다. 그러기에 그 겨울을 빼앗으면 발아가 불가능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씨앗을 속이기 위해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파종하기도 한다지만 그렇게 발아한 씨앗은 정상적으로 크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창밖의 들판을 내다봅니다. 들판은 아직 호밋날 하나 들어설 데 없이 바짝 얼어붙은 죽은 땅입니다. 그러나 그건 우리의 생각일 뿐 거기 흙에 묻혀있는 숱한 씨앗은 냉혹한 추위와 싸우며 생명을 분출시킬 힘을 비축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들에게 그 시련을 빼앗으면 안 된다는 걸 씨앗상자에 들어있는 작약 씨앗이 내게 말해줍니다.
노지에서 혹독한 겨울을 나야 꽃은 더욱 예쁘고 향기롭지요. 무려 6개월이라는 긴 어둠의 시간을 견딘 뒤, 5월 어느 날에 피우는 꽃나무들의 그윽한 꽃향기를 우리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련을 피하는 꽃씨는 향기로운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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