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늙은 호박을 위한 명상

권영상 2017. 2. 15. 21:03

늙은 호박을 위한 명상

권영상





창밖이 봄이다.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게 봄이다. 창밖의 나무들이며 아파트며 하늘이며 놀이터 미끄럼틀 모두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다.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 있다. 그러나 내 감각에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 경계심이 풀려지기 시작한다.

거실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갔다. 오래 전에 내놓은 의자가 눈에 띄었다. 거기 앉아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 든다. 마치 지각을 뚫고 나오는 봄처럼 내 몸에서 그 생각이 불쑥 일었다. 책을 들고 의자 앞에 선다. 안 됐다. 나보다 먼저 앉아 있는 녀석이 있다. 지난 가을에 구해온 늙은 호박이다.



호박이 삼동내내 거기 앉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느끼지 못했다. 하루에 한두 번은 베란다에 나가 화분에 물을 주고, 빨래를 널고 걷고 그 일을 했다. 그랬지만 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호박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호박이 내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이 옳겠다. 그는 거기 있어도 있는 둥 마는 둥 했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듯 했고, 없다 한다 해도 없는 것도 아닌 그런 존재였다. 앉아있어도 아주 당당히 그 크고 풍덩한 엉덩이를 내려놓고 앉아 있었다. 하루 이틀도 아닌 석 달이나 넘게.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이렇다할 불편을 준 적이 없었다.

옛날의 고향집 방 한 구석에 세워놓은 늙은 호박에서도 그런 걸 느꼈다. 식구가 많아 복닥대는 좁은 방이었는데도 우리는 호박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새삼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이 인생을 달관한 듯한, 아니 장자 한 권을 다 읽은 듯한, 아니 거기 있으되 전혀 있지 않은 듯한 그 오묘한 늙은 호박의 존재감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날 어머니가 한 동안 집에 와 계신 적이 있었다. 그때 열흘이 지나면서부터 어머니가 조금씩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세 식구가 살아온 공간에 어머니가 들어서자, 우리의 생활 패턴이 조금씩 어머니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건 당연한 도리인데도 불편함을 느꼈던 게 솔직한 고백이다.



그때 어머니는 우리에게 내 앞에 있는 호박 이상의 겸양과 침묵을 보여주셨다. 우리의 생활방식을 건드리지 않으시려고 애쓰시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겸양과 배려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또 불편함이 되기도 했다. 아, 어머니마저! 그때 나는 속으로 나의 지극하지 못한 불효에 놀랐다.

이제 내가 나이가 들어 예전의 그 어머니의 연세에 와 있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나도 내 자식을 찾아갈 그런 때에 이르렀다. 나는 이 호박의, 한 자리에 오래 앉아 있어도 존재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그러면서도 한 자리를 제대로 차지하는 삶을 배우고 싶다.



의자에 놓여있는 호박을 들어내고 의자에 앉은 먼지를 닦았다. 실은 그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위한 일이었지만 자리를 빼앗는 것 같아 다시 호박을 올려놓고 물러섰다.

“봄이 오기전에 호박죽 해먹어야 할 텐데......”

나를 지켜 보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그 말에 나는 봄도 아직 멀었는데 좀더 놓아두자고 얼른 늙은 호박 편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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