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는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됐다

권영상 2023. 5. 25. 15:59


나는 갑자기 시간 부자가 됐다

권영상

 

 

 

모임에 나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내의 바깥 볼일에 맞추어 함께 나오다 보니 그만 좀 일찍 나왔다. 기껏 아파트 정문에서 서로 헤어질 걸 가지고 20여분이나 당겨 나왔다. 시간을 들여다볼수록 좀 아쉽다. 혼자 전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갑자기 얻은 이 많은 시간 때문에 늘 지나치던 길갓집 장미 앞에 서 본다. 흔히 보는 빨간 줄장미가 아니다. 분홍색, 해당화꽃 모양의, 낯설지만 예쁜 장미꽃이다. 다가가 코를 내어 향기를 맡아본다. 곱다. 이름이 궁금해 사진을 찍어 ‘모야모’에 보냈더니 시애스타라 한다. 지중해 연안이 고향인, 꽃말이 정오인 낮잠이다.

모르는 길고양이 한 놈이 내 발아래에 다가와 나를 쳐다본다. 야옹! 말을 걸어본다. 나를 데려다 줄 것처럼 앞장 서서 걸어 나간다. 야옹아! 야옹아! 야옹이를 부르며 함께 간다.

 

 

나는 시간이 많아 전철 계단 대신 마트로 들어선다. 그길로 가면 좀 돌기는 해도 전철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할 일 없는 사람처럼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나 혼자다. 내려가면서 벽면 거울에 나를 비춰본다. 푸른색 체크무늬 남방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익숙한 얼굴의 나를 내가 본다. 오랜만이다. 나이를 감추느라 염색까지 했다.

‘전철이 좀 늦게 왔으면 좋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며 불쑥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지금 시간이 많다.

평소 같으면 시간 없다며 모임 시간에 맞추어 빠듯하게 집을 나온다. 모임 자리에 남보다 좀 먼저 가면 안 되는지. 먼저 가 있는 시간이 뭐가 그리 아깝다고 시간 싸움을 하듯 모임에 허둥지둥 간다.

전철을 타러가는 길은 약간 올라가는 언덕길이다. 그 길을 부지런히 걷는다. 혹시 도중에 지갑을 놓고 나오든가, 휴대폰을 놓고 나올 때면 돌아서서 집으로 달려가던 때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어찌 어찌 나온다고 나와 보면 습관이 되어 시간은 늘 빠듯하다.

 

 

그런 날은 전철 승강장에 내려가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전철이 딱 맞게 대주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런 날은 전철이 내 속을 보고 있는 듯 바로 눈앞에 사람들을 풀어놓고 휙 달아난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모임에 늦게 들어서는 상황을 떠올린다. 먼저 온 연장자들을 떠올린다. 먼 지방에서 올라온 이들을 떠올린다.

‘전철이 왜 이리 늦는 거야!’

시간이 없는 나는 급기야 불평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시간이 많은 오늘은 아니다.

은근히 전철이 더디 오기를 바란다. 검표대를 지나갈 때면 맨 뒷줄에 서려고 내 몸이 자꾸 뒤로 물러선다. 승강장 계단을 걸어 내려갈 때도 나는 허겁지겁 잰걸음을 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멀찍이 뒤에서 내려간다.

시간이 많은 이런 날의 전철은 하필 너무 일찍 들어온다.

나는 자연히 늦게 타기 위해 맨 뒷줄에 서서 천천히 전철 안으로 들어선다. 나 때문에 문이 좀 늦게 닫히라고 발을 늦게 뺀다. 시간이 많은 이런 날은 전철이 한 정거장 간격으로 달려라 달려라 달려온다. 그 탓에 전철은 문을 닫자마자 쾌속으로 달린다.

 

 

20분 일찍 나왔는데, 나는 20분 어치 이상의 더디 가는 여유를 즐긴다. 그 시간 집에 있어봤자, 못 다한 일을 마치고 가느라 허둥댈 뿐이다. 20분 일찍 나오고 보니 나는 시간이 많은 시간 부자가 된 기분이다. 더디 가는 기쁨이 이렇다.

 

<교차로신문>2023년 6월 8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탁상시계  (1) 2023.06.10
옥상 위의 카페  (0) 2023.06.01
우리는 연민의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  (1) 2023.05.16
아웃 오브 아프리카  (2) 2023.05.03
그대와의 대화  (0) 2023.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