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 오브 아프리카
권영상
모처럼 쉬는 날.
빈둥빈둥 놀고 싶었는데, 어쩌다 켠 텔레비전에서 불쑥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나온다. 낯익은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
덴마크 태생 카렌(메릴 스트립 역)은 아프리카 동부로 옮겨가 부유한 남편 브로와 결혼한다. 하지만 브로는 커피 농장 일을 아내에게 맡기고 자신은 늘 사냥을 하러 멀리 떠나간다. 남편을 기다리는 일에 지친 카렌 앞에 탐험 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가 나타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1900년대 초 유럽인들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 영화다.
1986년 개봉 이후, 극장을 찾아가 몇 번 보았고, 오늘처럼 우연히 보기도 하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건 아름답고 경이로운 아프리카의 자연미다. 아프리카라는 이국 풍경을 배경으로 불륜이라는 소재를 별 저항감 없이 풀어내는 서사구조가 이 영화의 스토리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내용과 좀 다르다.
그보다는 은근히 1부 1처제가 갖는 완고함, 또는 그 불합리라든가 또는 그 경계를 넘나들고 싶어하는 욕망을 감춘 영화로 읽혀진다. 그러니까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사랑하는 1처 2부의 난혼의 욕망을 아프리카라는 원시적 자연을 배경으로 그려낸 게 아닌가 싶다.
1처 2부가 가능하려면 자유와 속박이라는 두 축이 필요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두 남자, 데니스와 브로는 수렵 난혼시대의 남성들처럼 자유로이 탐험하고 사냥하고, 그러다가 여자를 찾아 가끔씩 돌아온다. 그러나 카렌에겐 남자를 지속적으로 붙잡아두려는 속박의 욕망이 있다. 결국 이들의 욕망은 데니스의 죽음으로 끝나고, 카렌은 덴마크로 돌아간다.
근로자의 날, 오래된 영화로 오후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옛일이 있다.
결혼을 하고 신접살이를 할 때 어머니가 오셨다. 내가 막내였으니 그때 어머니 연세는 일흔을 넘기셨고, 아내와 나는 성남시에 있는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았다.
고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왔다.
나는 어머니에게 뭔가 좀 특별히 잘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게 영화였다. 촌부로 사신 어머니는 내가 알기에도 극장에 가셔서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어머니는 ‘박씨부인뎐’이나 ‘임진록’을 즐겨 읽으셨고, 먹을 갈아 자식들과 서신을 하신 분이었기에 나름 서사가 있는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가까운 극장에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상영되고 있었다. 자막도 미처 따라 못 읽으실 어머니에게 우리 영화도 아닌 하필 이국의 영화라니!
어떻든 어머니와 아내와 나, 셋은 조심스럽게 2시간 가까운 영화를 보고 돌아왔다.
어머니가 영화에 대해 한 말씀 하셨다.
“거기 나오는 남자들이 꼭 너희 당숙을 닮았더라.”
당숙께선 함흥이나 만주 땅을 훨훨 돌아다니다가 서너 달에 한 번씩 당숙모 혼자 지키는 집으로 돌아오셔서 기껏 하루 이틀을 자고 또 나가시곤 했단다. 그러시며 남자들한텐 다 그런 천성이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
70 연세의, 아무 것도 모르실 줄 알았던 어머니가 외국 영화를 제대로 보신 거였다.
오늘처럼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볼 때면 그 옛날의 어머니가 불현 생각난다.
<교차로신문> 2023년 5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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