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가 있는 풍경
권영상
내려야할 전철역을 놓쳤다.
정신을 딴 데 파느라 한 정거장 더 가고 말았다. 역에서 내려 지상에 올라와 보니 알겠다. 봄이 깊다. 가로수들은 이미 녹음으로 우거졌고, 햇빛이 덥다.
놀이터를 지나고, 음식점 골목을 지나고, 한길을 건넌 뒤 느티나무 그늘 벤치에 잠시 앉았다. 무심코 눈이 가는 곳에 갤러리가 있다. 일어나 그리로 갔다. 평일이라 그런지 그림을 보는 이는 나 하나뿐. 한 바퀴 빙 둘러봤다. 성격이 다른 네 화가의 공동전시회다.
그 중에 내 눈에 띈 그림들이 있었다. 사다리를 주제로 한 풍경이다.
사다리는 이층 옥상에 세워져 있거나 이팝나무 꽃 가득 핀 나무 둥치거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 걸쳐져 있었다.
나는 사다리가 있는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마치 내가 그 사다리를 잡고 옥상을 오르거나 구름 위에 얹어둔 그 무언가를 내리러 갈 것처럼, 이팝나무 꽃 숲에 숨어들어 휘파람을 불거나 다리를 뻗고 봄잠이나 한잠 잘 것처럼 다가갔다.
고향 집에도 사다리가 있었다.
사다리는 주로 지붕을 이거나 고칠 때에 쓰였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지붕에 세워놓은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밟고 올라가서는 오랫동안 사라지셨다. 그리고 여기에 없던 아버지가 다시 지붕 위에서 쓱 내려오시곤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사다리 위의 세계가 궁금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바로 전쯤이다. 윗마을에서 돌아오는 길에 먼 곳 우리 집을 보고 나는 놀랐다. 누군가 지붕 위를 걷는 사람이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그 사람은 마치 구름을 밟으며 구름 위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점점 가까이 와 보니 그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지붕을 이시느라 하루 종일 지붕 위에 계시다가 해 질 무렵에야 내려오셨다. 그 옛날 아버지는 엄하셨고, 말씀이 별로 없으셨다. 그런 시절이었으니 지붕에 올라가셔서 저녁 무렵에야 내려오시는 아버지는 신비로웠다. 나는 네다섯 살 무렵부터 어머니가 읽어주시는 ‘박씨부인뎐’을 즐겨 들었다. 거기 금강산에 사는 박씨 부인의 아버지 박 처사란 분은 한양 길을 떠날 때면 구름을 잡아타거나 학을 타고 갔다.
그 시절,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시거나, 사다리를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시는 아버지는 박 처사라는 분과 비슷했다.
그 후, 조금 조금 머리가 굵어질 때다. 사다리를 타고 고추멍석이 지붕으로 올라가고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본 나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사다리에 올랐다. 한 칸 한 칸 내 키 높이만큼 올라가서는 무서워 다시 내려오고, 마음을 다잡고 난 뒤 다시 오르곤 했다. 그러다가 내 키보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등 뒤 세상을 바라봤다.
그때 내 눈앞에 펼쳐지던 낯선 풍경에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어제까지 높기만 하던 뜰 안의 나무들이 턱없이 작아 보였고, 마을로 이어진 길이며 담장 너머 풍경들이 낯설기만 했다. 그것은 나의 시선의 높이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모르던 나는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은 저마다 세상을 다르게 본다고 생각했다.
그림 속 구름에 걸쳐놓은 사다리 풍경을 본다.
구름에 걸쳐놓은 사다리는 누가 타고 올라갔을까. 어쩌면 오래 전에 올라가신 아버지가 지붕 위에서 일을 마치고 저녁을 잡수러 내려오실 것만 같다.
<교차로신문> 2023년 4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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