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초의 행복
권영상
바람 분다 하더니 바람 분다.
마당가 조팝나무가 흔들리고 모과나무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건너편 산의 참나무들이 윙윙 바람 흉내를 내며 이리저리 몸을 흔든다. 바람 덕분에 기척 없이 살아가던 것들이 비로소 일어선다.
냉이꽃은 냉이꽃 대로 파르르 몸을 흔들며 일어서고, 나무는 나무대로 흔들흔들 몸을 흔들며 우주와 교신을 위해 잎을 피운다. 좀 힘들어도 풀이나 나무나 모두들 바람 불면 좋다. 다들 바람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온 것들이다. 그건 나도 그렇다. 조용할 대로 조용해진 마음보다 산란하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좋다.
그건 내가 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나무든 사람이든 크든 작든 흔들려야 서 있는 자리가 굳건해진다.
바람 덕분에 처마 끝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찔끔 한번 운다.
한 자리에 매달려 오랫동안 편안히 살아온 풍경은 게으를 대로 게을렀다. 웬만한 바람에도 울지 않았다. 풍경소리 듣자고 풍경을 매달아 놓았는데 그는 제 복무를 잊고 안락에 취해 있었다. 나는 끝내 풍경을 떼어 다락방 위태로운 처마 끝에 옮겨 달았다.
정신을 차렸는지 처음엔 쟁그렁거리며 제법 울었다.
그러더니 내가 집을 자주 비우는 걸 알고는 이내 다시 게을러졌다. 바람이 암만 불어도 풍경 안의 붕어는 까불기나 할 뿐 제 몸으로 종의 안쪽을 때리지 않았다. 게으름을 즐기는 듯해 애써 풍경을 불러 게으름을 깨우쳐주느니 ‘풍경 없다’ 하고 살기로 했다.
풍경은 가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내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은 울어주었다. 우는 소리에 정신을 곤두세워 귀를 기울이면 약 올리듯 뚝 그쳤다.
쨍-,
울어도 그렇게 딱 한 번 울었다.
쨍그랑도 아니고 쨍그렁도 아니다. 딱 쨍, 그 한 번이다.
그것은 풍경의 설계의 문제이거나 바람에 잘 반응하지 못하는 풍경의 무게와도 관련이 있을 듯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풍경을 탓하기보다 풍경의 성질에 따르기로 했다.
가끔 책을 읽거나, 강낭콩 씨를 고르거나 베갯모의 터진 데를 꿰매다가 문득 풍경 소리가 들리면 나는 재빨리 그 금속성의 맑은 충돌을 즐겼다. 알다시피 두 번은 없다. 눈곱만치 짧은 단 한 번의 울음. 온몸이 귀로 쏠리는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아! 하며 그 청랑감에 짜릿한 행복을 느꼈다. 전류가 흐르듯 아찔하면서도 몸이 맑아졌다.
0.3초쯤 되는 그 짤막한 순간의 행복을 얻기 위해 오늘 같이 강풍이 불거라는 예보를 들으면 나는 아침부터 행복을 즐길 준비를 한다.
예보대로 이만한 바람이면 아무리 게으른 풍경이어도 한두 번은 울릴 게 분명하다. 나는 풍경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창문을 반쯤 열어둔다. 휴대폰을 서랍 속에 숨겨둔다.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일깨운다. 풍경소리는 한 순간이니까 가급적 문 여닫는 소리를 낮춘다. 풍경으로부터 멀리 나서지 않는다. 귀를 열어둔다.
시골에 내려와 머무는 나의 시간은 온통 침묵이다. 그러니 행복이랄 게 뭐가 있겠는가. 행복이라면 흐린 정신을 잠깐 일깨워주는 풍경의 시간뿐이다. 쨍! 하는 그 짧은 0.3초의 행복과 그것을 준비하는 시간뿐이다.
<교차로신문> 2023년 4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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