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쓰는 편지>
남쪽의 젊은 시인 S에게
권영상
그대는 잘 있는지.
동회에 일이 있어 다녀오다가 동회 앞 목련나무를 보며 그대를 생각했다네.
복지관 앞
앙상한 그,
무얼 얻으려 서 있나 했는데
아니었어요.
오히려
환한 밥덩이 몇을
가만히 내놓는 것이었어요.
그대의 시도 떠올랐다네.
그대의 ‘목련꽃’을 보면 그대의 시가 얼마나 솔직한지 나는 발걸음을 멈추어 그대의 목련을 한참 더 올려보았다네.
그러다가 내 발치에 떨어진 목련 꽃잎 한 장을 집어 들었다지.
혹시 이 하얀 꽃잎 위에다 그대에게 편지를 써볼까 하다가 다시 적당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네. 때 묻은 내 글을 쓰기에 목련꽃은 떨어진 꽃이어도 너무 순결하였다네. 이제는 내가 세상에 너무 많이 물들어서 풀잎이라 할지라도 그 위에 글을 쓰기가 미안하다네.
편지라고 하니 생각나네.
30대엔 원고지에다 펜촉으로 편지를 썼지. 나름 순수했으니까. 50대엔 먹물을 적셔 세필로 편지를 썼지. 나름 척하였으니까. 60대엔 간단히 엽서로, 이메일로, 그러다가 더 간단히 문자메시지로 편지랍시고 보냈지. 나름 사는 요령을 터득했으니까. 그러고 말일세. 앞에서 빠뜨린 40대엔 자작나무 아래에 떨어진 자작나무 껍질을 물에 불려 다리미로 다려서는 그 위에 글을 적어 보냈다네. 그 나이엔 한다면 했으니까.
그때엔 열정 아닌 열정이 있었지. 근데 오늘은 내 급한 성정을 억누르며 워드프로세서로 쓴 글을 줄 친 노트에 옮겨 적을 참이네. 그대의 ‘목련꽃’과 ‘봄눈’을 생각하며.
오늘은 목련꽃 때문에 그대가 생각났지.
나는 그대를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그대의 시를 읽어보면 그대가 얼마나 솔직하고, 얼마나 마음이 여리고, 얼마나 조금 덜 가진 걸 사랑하고, 얼마나 하늘 보다는 땅이라는 걸 사랑하는지, 얼마나 진실이라는 걸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네.
‘이 시집을 누구에겐가 바치자 하니 그가 선뜻 받아 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집을 손에 들고 한 동안 어쩌지 못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시인의 말’이 얼마나 솔직한지 눈물이 났다네. 어느 날 ‘바보’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그 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는 그대라는 사람을 나는 뭐가 부럽다고 이렇게 부러워한다네.
나는 그 나이에 잘 난 척을 하고, 세상을 얕보고, 폭우와 대적하고, 가파른 고산과 한설을 대적하며 그게 오만인 걸 모르고 오히려 패기인 줄 알며 살았지.
그러느라 나의 청년 시절은 한 곳을 향해 질주를 하느라 놓치고 만 것이 너무나 많았다네. ‘한 끼분의 밥그릇 깊이도’ ‘헛디디면 넘어질 만한’ 함정임을 깨우치지 못했고, 추운 날 쇠스랑으로 두엄더미를 헤치면 ‘삶은 이 더러움 속에서 따뜻했다’는 날카로운 그대의 눈을 가지지 못했다네. 나는 사소한 일상을 아주 사소하게 옷을 입혀 내놓는 그대의 은유를 사랑하네.
그대의 그 간소한 시의 품성과 은유와 외로움과 ‘밥상다리처럼 순종’할 줄 아는, 아니 순종을 사랑하는 그대의 순종을 나는 좋아한다네.
그것은 그대만이 홀로이 독점하고 있는 미덕이지. 그 까닭에 가끔 내 멋에 겨워 내 길을 달음박질쳐 가다가 멈추어 서면 먼저 그대를 떠올린다네.
그대가 친구 길수와 용달차를 몰고 ‘바닥에서 바닥으로’ 다니면서도 ‘어딘가에 모르는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 같은’ 세상에 대한 따스한 기대감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네. 시집을 바치자 하니 바칠 사람이 없다 하지만 어쩌면 그대의 시집을 받아줄 이는 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그분들이 아닐까 한다네.
그대가 보유하고 있는 이런 많은 분들, 숨소리가 낮고 바스락거리는 가랑잎 같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는 그대가 나는 부럽네.
그대를 사랑하기에 나는 가끔 그대라는 커다란 벽 앞에 서서 나를 들여다본다네. 나는 지금 어디로 홀로 가고 있는지, 나를 잃고 선 나를 찾을 때가 많다네.
나이를 자꾸 먹으면서 대체 몇 살까지 어린이를 위한다는 이 시를 염치없이 써야 하는지 그걸 종종 생각하네. 독자를 온전히 아는 일에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있네. 시간을 많이 사용해도 내가 바라던 시와 자꾸 멀어지는 내 시가 나를 더욱 힘들게 하네.
젊은 시인들의 시는, 그대도 아는 바와 같이 날로 발달하네. 그런가 하면 나의 시는 날로 기울어져가네.
올봄엔 춘백이 피는, 남쪽 그대의 방에서 지어올리는 그대의 시를 보고 싶네.
이따가 문방구에 가서 펜을 사다가 이 편지를 옮겨 적을 걸세.
좋은 시 쓰시며 잘 사시게. 젊은 시인 s씨 그대여.
2023년 목련이 피는 3월에
권영상
<동시마중>2023년 5,6월호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풍선이 내려왔다 (0) | 2023.04.12 |
---|---|
모종철이 다가오고 있다 (0) | 2023.04.05 |
얼룩말이 담장을 넘다 (0) | 2023.03.30 |
한때는 몹시 사랑했던 것들 (0) | 2023.03.23 |
주례 없는 결혼식의 부담 (0) | 2023.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