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주례 없는 결혼식의 부담

권영상 2023. 3. 16. 18:12

 

주례 없는 결혼식의 부담

권영상

 

 

 

휴대폰으로 결혼식 초대장이 날아왔다. 그것도 같은 날 두 건이다.

첫 예식은 12시이고, 두번 째 예식은 교대역이 가까운 곳으로 오후 230분이다. 적혀있는 계좌번호로 축의금만 보내고 말까 하다가 나중을 생각하여 일어섰다.

부랴부랴 시간에 맞추어 식장에 들어섰다. 이제는 내남없이 하는 주례 없는 결혼식이다. 양가 아버지가 나와 축사 겸 인생 선배로서의 살아나갈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를 생각하여 은근히 귀를 기울였다.

 

 

신부의 아버지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읽은 뒤 세상을 정직하게만 살기는 어렵겠지만 하늘을 우러러 크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어 점잖아 보이는 신랑 아버지가 나왔다.

그는 밤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적은 글을 읽겠다며 새 출발하는 아들과 장차 며느리가 될 신부를 위해 몇 가지 당부를 털어놓았다.

여자 보는 눈이 매우 탁월하구나. 이 아빠가 미인인 네 엄마를 꼬실 때, 그 때의 나를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며 먼저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을 듣고 축하객들이 와아, 웃었다. 나도 웃었다. 이런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분이야말로 내심 소탈한 분이겠구나, 했다.

 

 

갈수록 그 분의 이야기 실력이 돋보였다.

자식은 너무 많이 낳을 생각을 마라. 아들은 낳아봐야 사고만 치더라. 아들 한명보다 딸 네 명이면 충분하다.

그 말에 또 웃음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나도 웃었다. 자식을 낳지 말라 하면서도 은근히 네 명이나 낳으라는 아버지의 유머가 재미있었다.

그분은 축하객들을 웃겨보기로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부모에게 효도하라.

처가에는 자주 가더라도 엄마 아빠한테는 자주 오지 마라.  대신 아빠 계좌에 용돈만 넣어주면 된다. 그리고 아빠가 언제 부탁하거든 캠핑카나 한 대 사다오.

이쯤에서는 다들 식장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예식이 끝났다. 인사차 찾아온 신부 아버지에게 축하 인사와 더불어 사돈의 수완을 경계하라고 싱겁게 귀띔했다.

 

 

그러고 나는 230분의 결혼식을 위해 부랴부랴 식장을 빠져나왔다.

예식장은 교대역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달려간 그곳 역시 주례 없는 결혼식이었고, 신부의 아버지와 신랑 아버지가 축사와 당부의 말을 했다.

거기서 나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신랑의 아버지가 읽어 나가는 글이 좀 전의 예식장에서 들었던 신랑 아버지의 원고와 똑 같았다. 네 엄마를 꼬실 때라거나 아들 말고 딸 넷을 낳으라거나 아빠 은행계좌에 용돈을 넣어달라거나 캠핑카를 사달라는 글을 글자 하나 빼지 않고 읽어나갔다.

 

 

집에 돌아와 유튜브를 검색했다. 거기 그와 똑 같은 동영상들이 널려 있었다.

밤새워 고민하여 적은 이 글을 읽겠다는 말까지 그대로 거기 있었다. 나는 실소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 주례의 몫을 신랑의 아버지가 힘들게 짊어지는구나 싶었다. 사실 다중 앞에서 말을 잘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미를 추구하는 요즘 결혼 풍습에 맞추어 잘 말하기란 더더욱 부담스럽다. 그러니 울며 겨자 먹기로 유튜브를 찾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나도 그런 자리에 서면 그때는 어떤 말을 좌중을 웃겨야 하나. 잠자리에 누워서도 그 생각을 하느라 턱없이 잠이 늦었다.

 

<교차로신문> 2023년 3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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