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사랑은 3월이 적격이다

권영상 2023. 2. 21. 13:16

 

사랑은 3월이 적격이다

권영상

 

 

2월이 갔다. 갔다고 해서 하는 말이 아니지만 2월의 길은 너무 짧다. 연인이 되기 위해 만나는 길이라면 서로 이름을 묻고, 나이를 묻고, 사는 곳을 물을 때쯤 끝나는 길이 2월의 길이다. 좀 더 깊은 대화의 길로 들어가기엔 28일은 너무 시간이 없다.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면 2월보다는 3월이 좋다. 2월의 마음은 2월이 아니라 따스한 3월에 가 있기 때문이다. 2월 사랑은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다. 사랑하고 헤어지면 고대 잊고 말 사랑이 2월 사랑이다. 사랑이란 서로를 물들이는 일이다. 그러나 2월 사랑은 스며들거나 깊어질 사이가 없다.

 

 

2월 사랑은 정이 없다. 헌신적이지 않다. 촉촉하지도 않고 산뜻하지도 않다. 정겹거나 물론 빛나지도 않다. 옷깃 사이로 파고드는 을씨년스러운 바람 같은 사랑이 2월 사랑이다.

사랑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두 사람이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과 함께 하는 것이다. 사랑의 고백이 대개 햇빛 반짝이는 날 초록으로 무성한 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지거나 그 아래에서 순정을 고백했을 때 무릇 잘 받아들여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로보아 2월은 사랑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초췌한 햇빛과 초췌한 바람과 가끔씩 내리는 초췌한 찬비와 헐벗은 가로수가 있는 싸늘한 도시이거나 들판은 사랑의 배경치고 너무 삭막하다. 2월은 사랑의 감정을 주고받는 일과는 거리가 조금 먼 달이다.

2월은 사랑보다 사랑의 문으로 들어서기 위한 이주의 달이다. 사랑도 이주가 완전히 끝난 뒤에 사랑이다. 2월 바람은 사랑이 그리운 이에게 이주를 권한다.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다면 자신이 원하는 그곳으로 떠나길 바란다. 여기 머물러 앉아 사랑을 기다리는 일은 어리석다. 식물들이 이주를 위해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 그렇다. 먼 거리거나 근방, 그렇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으로의 이주는 언제나 2월 바람이 돕는다.

 

 

조금이라도 시력이 좋은 이들이라면 서둘러 이주하는 생명들을 볼 것이다. 명주실처럼 하얀 은실에 매달린 작은 씨앗들. 그게 박주가리 씨앗이다. 그들은 겨울 내내 바늘쌈 같은 씨앗주머니 속에 씨앗을 매단 은실을 차곡차곡 포개어 말린다. 바람보다 더 가볍게 말려서는 2월 어느 바람 좋은 날, 씨앗주머니를 터뜨려 낙하산을 펼치듯 바람을 타고 그들이 그리던 땅으로 이주한다.

그들은 사랑을 원한다.

 

 

박주가리만인가. 마른 갈대 끝에 나부끼던 갈대들의 솜털 꽃씨며 부들 씨앗도 2월이면 살던 곳을 떠난다. 솔방울 틈에 숨은 솔씨도, 소루쟁이 꽃대에 외로이 매달려 겨울을 나던 소루쟁이 씨앗들도 2월 바람의 마지막 도움으로 길을 떠난다.

아파트 창밖을 내다본다.

건너편 아파트에 이삿짐차가 왔다. 또 누구네 집이 이사를 가는 모양이다. 어떨 때는 하루에 두 대의 이삿짐 차가 온다. 2월은 사람들 역시 이주하는 달이다. 가야할 곳으로 떠나 거기 정착하면 3월이 올 테고, 세상은 바야흐로 연둣빛으로 물이 들 테다. 사랑은 세상이 온유해지는 3월이 적격이다.

 

 

드디어 3월이 왔다. 따스한 봄 햇빛과 봄바람과 봄 비 사이를 걸으며 사랑을 이야기할 때가 왔다. 3월에는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다 즐겁다. 그 어떤 이야기를 해도 행복하게 웃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모두 아름다운 사랑의 조짐이며 시작인 것이다. 3월은 사랑으로 물들어 가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다.

지금부터 사랑하라.

 

<교차로신문> 2023년 3월 2일자

'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 봄바다  (0) 2023.03.08
겨울은 가고 봄이 오다  (0) 2023.03.02
호박과 자유와 오래 된 오해  (0) 2023.02.13
2월에 만나는 올똘댁 할머니  (0) 2023.02.07
벌써  (0) 202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