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권영상
달력을 보다 ‘세상에 벌써?’ 하고 놀란다.
벌써 2월 6일이다. 2월 달력을 넘긴지 얼마 됐다고 벌써 2월의 둘째 주 월요일이다.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며 카톡 보내던 일이 엊그젠데, 벌써 2월에 와 있다. 나만 그런가. 내게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건가.
나는 탁상 달력을 집어 들고 지나간 1월을 도로 넘겨본다. 새해맞이가 있었고, 설이 있었고, 신년모임이 두 번, 그리고 백수를 넘긴 이모님이 돌아가셨다. 하는 일없이 놀거나 여유를 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지나간 시간을 허송세월한 것처럼 아쉬워한다. 아니 무슨 죄나 저지른 것처럼 참회한다.
깊은 밤, 잠에서 깨어 조용히 창밖을 내다볼 때가 있다. 광활한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올려다 보면 알 수 없는 어떤 먼 시간을 느끼게 된다. 내가 지금 여기 와 머무는 것이 신비롭기도 하고, 내가 떠나갈 우주를 더듬어 보는 일 역시 신비롭다. 사람은 시간 여행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시간 속에 머무는 존재다. 시간 속에서 태어나고 사랑하고 늙고 그러다가 시간의 무게에 못 견뎌 어딘가로 떠나간다.
내가 15살 무렵의 일이다.
14살쯤에 알게 되어 급속히 가까워진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그때 나는 중학교에 다녔고, 그는 넝마주이였다. 잘 알려진 관광지 근처에 살았으니까 바다와 호숫가에 가면 그 일을 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한 몸처럼 가까워졌다. 그는 내게 담배를 가르쳐 주었고, 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어느 때 그는 내게 담배와 술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토요일 오후면 닭장에서 달걀을 꺼내들고 호수 건너 그가 일하는 곳을 찾아가곤 했다. 그는 나를 만나면 하던 일을 놓고 내가 보는 데서 결코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나보다 덩치가 작은 그였지만 그는 생각이 나보다 깊었다.
“이제 나를 만나러 오지마.”
어느 날인가 그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내가 그의 일을 방해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뭐 좋은 일이라고 이 모습을 보러 오냐?” 그거였다. 자신도 누군가 하는 이 일을 지켜보다가 결국 그를 따라 이 일을 하게 됐다는 거였다.
그는 걷지 못하는 할머니와 누워만 있는 병약한 아버지와 한 방에서 사는 어린 가장이었다. 늦은 여름, 그는 사는 일에 너무 지쳐서 호수에 자신의 고단한 목숨을 집어던졌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물속에서 이끌려나오는 그를 본 후, 15살 내내 나는 울었다.
‘20살까지 살 수 있을까.’
산다는 게 두려운 거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다. 그러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를 20살까지의 나이를 세어보곤 했다. 그렇게 저렇게 또 살다가 20대에 들어서면 나는 또 ‘30살까지 살 수 있을까.’ 그러며 남은 30대의 나이를 세곤 했다. 그렇게 40대를, 50대를, 넘기면서 나는 벌써 여기까지 왔다.
나는 그 동안 10대 단위로 시간을 끊어 무려 여섯 번의 인생을 살았다. 그 배경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어쨌건 나는 그와 다른, 이쪽 세상에 남아 ‘벌써’ 이렇게 많이 살았다. 사람은 분명 시간에 길들여진 여행자다. 시간이 2023년 2월까지 나를 데리고 왔다. 3월이 오면 나는 또 봄을 쫓아 3월의 시간 여행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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