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들은 설 이야기
권영상
오래 전 일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은 설 이야기가 있다.
예전엔 섣달그믐날 초저녁에 조상님께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었다는.
그때는 그 말씀을 무심히 들었다.
그 후,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에 편승하느라 섣달그믐날에 떡국을 먹는다는 말씀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한때는 신정을 쇠라고 나라가 신정 1,2,3일을 연휴로 만들더니, 또 한 때는 구정을 명절로 쇠라며 구정 전후 3일을 명절 연휴 기간으로 정했다. 우리의 지난 과거는 이렇게 정치에 끄달리며 혼란스럽게 살아왔다.
그랬으니 어렸을 적에 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되새길 여유가 없었다. 언제 또 어떤 구실로 이 구정 명절이 다른 무엇으로 바뀔지 지금도 우리는 모른다.
설을 쇠면서 아버지 말씀의 단초를 열기 위해 찾아낸 말이 있다. 까치설이다. 이 말은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제께고요.’라는 다들 아는 동요 가사 속의 말이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도 나는 ‘까치설’이란 게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는 모양이구나 했다. 그런 노래가 있으니 당연히 그런 말도 있겠거니 여겼다.
나는 오늘에서야 국어사전을 펴고 그 말을 찾아보았다. ‘어린 아이의 말로, 설날의 전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설날의 전날은 왜 까치설일까, 궁금증은 여전했다. 까치설이란 말도 위 동요가 등장하기 이전엔 없었다니 1930년대 이후의 말인 듯 했다.
포털 싸이트에 ‘까치설’을 검색했다.
‘까치설’은 ‘아치설’에서 온 말이라 했다. 여기서 ‘아치’란 ‘작은’이란 뜻인데, 아치설이 아치의 뜻을 상실하면서 소리가 비슷한 까치설로 바뀌었을 거란다. 그러니까 아치란 말은 까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작은설’이라는 아치설은 어떤 설인가. ‘어린 아이 말로, 설날의 전날’이라면 어린 아이들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설이라는 뜻인가.
그때 나는 아버지 말씀을 어쩌면 기억하고 계실지도 모를 작은형수님을 떠올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순을 훨씬 넘기신 고향 형수님께 전화를 드렸다.
형수님 기억은 연세에 비해 너무도 또렷했다. 손수 차례 음식을 차린 경험이 있으신 분이라 나이 차이가 많은 막내인 나의 기억 이전의 과거를 꼼꼼히 기억하고 계셨다.
예전엔, 그러니까 50 여년 전만 해도 애기설과 큰설이 있었다고 했다. 애기설은 섣달그믐날 조상님께 ‘떡국만’ 간단히 올리는 설로, 달리 ‘떡국설’이라 했고, 큰설은 정월 초하루에 떡과 음식을 올리고 세배를 주고받는 ‘설’이라 했단다.
일찍 자면 눈썹이 센다고 하는 섣달그믐날엔 일족이 두루 모여 떡국 제사를 올리고 둘러앉아 떡국을 들며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계획하며 그믐밤을 왁자지껄하게 보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설 전야제와 같은 식전행사로 설 분위기를 여는, 작은 규모의 떡국만 먹는 애기설이 아치설이었던 거다.
“섣달그믐에 모이고 설에 또 모이는 일이 번거롭다 보니 자연히 떡국설이 없어지고 설날에 떡국까지 먹게 된 거지요.”
설날 아침 음식이 많아진 것도 형수님 말씀처럼 그 때문이었다.
오래 전 내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떡국설’인 ‘애기설’이 사라지면서 귀한 우리 말 ‘아치설’도 사라진 것이다.
<교차로신문>2023년 1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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