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아내의 생일 선물

권영상 2023. 1. 12. 22:41

 

아내의 생일 선물

권영상

 

 

설이 지나면서 겨울이 점점 깊어간다.

바쁜 1월의 모임과 행사를 모두 마쳤다. 그제야 안성집이 생각이 났다. 물을 조금 틀어놓기는 했지만 점점 심해지는 한파에 집안 수도가 얼까 걱정됐다. 그 동안 사람들을 만나며 부대꼈으니 좀 춥기는 해도 안성에 내려가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먹을 걸 좀 챙겨 줘.”

내 부탁에 아내는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줬다.

 

 

그걸 싣고 부랴부랴 안성으로 내려왔다.

지난번에 온 눈이 아직 그대로다. 틀어놓은 수돗물을 살폈지만 다행히 얼지 않았다.

집안을 정리하고 마당에 나섰다. 건너편 목수 아저씨네 나무 보일러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펑펑펑 아랫마을 쪽으로 빠르게 날아간다. 어쩌면 지금 목수 아저씨네 손자들이 보일러 아궁이에 고구마를 던져 넣고 그게 익기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쇠스랑을 꺼내어 보리수나무 밑에 만든 유기농 거름더미를 한번 뒤적여주고, 지나가는 이웃 분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고, 그러다 보니 하루가 금방 갔다.

 

 

아내가 싸준 반찬으로 저녁을 먹고 있을 때다.

방학이라 집에 와 있는 딸아이한테서 문자가 왔다.

“아빠, 오늘 엄마 생일인 거 알아요?”

그걸 보자, 내 마음이 철렁! 했다.

아내의 생일도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짐을 챙겨 내려오다니! 너무 무심했다. 무엇보다 미안한 건 오늘이 생일인 줄도 모르고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아내는 속으로 뭐라고 했을까. 며칠 전부터 안성 이야기를 했으니 아내는 내가 가는 일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어쩌면 생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나저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부랴부랴 생일축하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그것만으로는 알 될 걸요.”

아내는 침묵하고 딸아이가 중간에서 제 엄마의 심정을 전하는 것 같았다. 정말 딸아이 말처럼 이대로 있다가는 후일을 감당치 못할 것 같았다.

내친 김에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내가 받았다. 아내 마음을 풀기 위해 나는 일없이 웃으며 내 능력 이상의 선물들을 이것저것 들먹였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아내가 간단히, 그리고 짧게 말했다.

 

 

“선물 말고 현찰로 줘.”

아내의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휴우, 했다. 이거야말로 아내의 마음이 풀렸다는 증거니까. 전화를 끊는데 저쪽에서 구원의 손길처럼 아내의 웃음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언젠가부터 아내는, 입에 담기 좀 뭣하지만 생일 선물 대신 ‘현찰’을 요구했다. 나는 그 쿨한 요구가 오히려 편했다. 선물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마음에 안 들 때에 날아오는 ‘그렇게 살아놓고도 내 마음 참 모르네’ 하는 비난까지 감수해야 했다.

 

 

거기에 비한다면 현찰은 정신 건강에 좋다.

근데 나는 어쩌다 그 ‘현찰’이 가는 곳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장모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시던 그 무렵부터다. 해마다 내가 모르는 요양병원에서 보내오는 감사의 답례품이 있었다. 아내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곳이 아내가 ‘현찰’을 보내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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