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겨울은 가고 봄이 오다

권영상 2023. 3. 2. 15:49

 

겨울은 가고 봄이 오다

권영상

 

 

모처럼 뜰안에 빈자리가 생겼다.

소나무가 섰던 자리다. 처음부터 우리가 손을 대기엔 너무 큰 소나무가 뜰안에 있었다. 그게 봄마다 민폐를 끼쳤다. 송화가루 때문이다. 4월 봄바람이 불면 송화가루가 흙길을 달려가는 자동차 먼지처럼 뽀얗게 날렸다.

남의 일이라면 멋있어 보였을 그 풍경이 내 일이고 보니 민폐였다. 우리 집은 물론 이웃집 창문이며 세워놓은 승용차 속을 비집고 들었다. 뜰에 널어놓은 빨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가끔 방 청소를 해보면 안다. 물걸레 밑이 송홧가루로 노랬다.

 

 

그뿐 아니다. 나무둥치 하나가 이웃 밭으로 기울어져 그 집 농사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궁리 끝에 소나무를 베어내기로 했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너무 커 불가능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알고 옆집 수원아저씨가 어느 날 감쪽같이 처리해 주셨다.

그러고 1년을 넘기면서 그 빈자리가 천천히 우리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난 늦가을이었다. 기온이 점점 떨어지자, 서둘러 무를 뽑아들였다. 함께 일을 마친 아내가 무슨 생각에선지 호미로 소나무 빈자리를 파헤치고 있었다.

 

 

“뭐 하려고? 곧 겨울이 올 텐데.”

아내는 거기다 쪽파를 심겠다고 했다.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쪽파 종구 한 봉지 얻어온 걸 거기 심겠다는 거였다.

“눈 올 텐데 살아날까?”

하늘은 연일 흐렸고, 멀지 않아 강추위가 온다는 기상예보를 심심찮게 듣던 터였다.

나는 뽑은 무밭을 정리하고 삽과 거름포대를 들고 아내 곁으로 갔다. 지난해부터 심고 가꾸는 재미에 빠진 아내가 얼른 앉은 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충분히 거름을 뿌리고 삽으로 깊게 땅을 파엎어 나갔다. 추위를 빤히 보며 쪽파를 심는 것이 잘 하는 일인지 걱정스러웠다.

 

 

파 종류가 추위에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생명을 노지로 내모는 일이 좀 잔인한 것 같았다. 하지만 경험은 중요한 일. 괭이로 이랑을 내고 아내에게 심는 법을 보여주었다.

“나머진 당신이 알아서 심어요.”

나는 나머지 일을 아내에게 맡겼다.

아내는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양 기뻐하며 그 일을 혼자 다 해냈다. 나는 쪽파들이 추울까봐 보리수 가랑잎을 긁어다 쪽파밭을 쪽  덮어주고 고추 지주대로 나란히 눌러주었다.

 

 

이튿날부터 강추위가 엄습해왔다. 예년과 달리 엎친데 덮친 격으로 눈까지 내리더니 기온이 영하 14도로 곤두박질쳤다. 이른 겨울부터 작정을 한  한파는 2월이 다 가도록 맹위를 떨쳤다. 나는 가끔 쪽파밭에 나가 ‘미안하구나! 잘 견뎌보렴.’ 그러며 쪽파를 달랬다.

근데 엊그제다. 쪽파 심은 데를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덮어준 가랑잎 사이로 언제 나왔는지 쪽파 순이 벌써 뾰족뾰족 올라와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그들이 너무나 기특했다. 삽 끝도 들어가지 않는 바짝 언 땅을 깨고 요 작은 것들이 살아 돌아왔다. 내 걱정은 기우였다. 나는 특식을 먹이듯 웃거름을 마침맞게 주었다.

허리를 펴고 매화나무를 보니 꽃망울이 볼록하니 맺혔다. 아직 꽃이야 한두 주일 더 있어야 피겠지만 우리가 움츠리고 있는 사이 봄이 뜰안에 들어와 있었다. 암만 추워도 겨울은 가고 봄이 온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되풀이 되는 오랜 이치다.

 

<교차로신문> 2023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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