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말이 담장을 넘다
권영상
얼룩말이 차도의 중앙선을 달리고 있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이게 뭔가 싶어 깜짝 놀랐다. 한길에 가득한 자동차 행렬과 그 차량들 사이를 드나드는 얼룩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대상을 조합하느라 나는 잠시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얼룩말이 아프리카에서 방금 우리나라로 달려왔다면 이건 너무나 즐거운 상황이다. 아니 얼룩말을 싣고 날아가던 헬기에서 얼룩말이 방금 뛰어내렸다면 이것 역시 너무너무 재미있는 상황이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이건 느닷없이 나타난 어느 초현실주의 설치미술가의 작품일 수 있다. 허공중에 붕 떠 있는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처럼 이 상황은 낯설다. 하늘에서 겨울비 대신 양복쟁이 사내들이 떼거지로 내려오는 그의 대표작 ‘골콩드’ 같이 황당하고 낯설고 충격적이다. 이건 문명과 자연의 갑작스런 충돌이다.
뉴스 말미에서야 알았지만 얼룩말은 우리나라 어느 동물원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그의 이름은 세로이고, 얼룩말들의 나이로 치자면 5살이다. 5살이면 사람의 나이로 어떻게 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떻든 늠름해 보이고 또 침착하기까지 하다. 내가 얼룩말이 되어 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 나이라면 동물원 바깥에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은 직감했겠다.
그곳은 사철 따뜻한, 무리지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땅. 그곳은 오래 전 그의 부모로부터 간간히 들어온 아프리카의 한 초원일 거라 믿으며 살아왔을지 모른다. 아직 아프리카 대륙에 대해 잘 모르니 세로의 부모도 세로도 동물원을 탈출한다면 언제든 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 믿지 않았을까. 먹을 것이 풍부하고 자유로이 들판을 달릴 수 있는 그곳. 세로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마다 담장을 뛰쳐나갈 결심을 했을 테다.
세로에겐 동물원을 탈출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태어나고 2년 만에 부모를 잃었다. 그리고 외롭게 3년을 더 살아 우리 나이로 5살이 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일어서고 달리는 그들의 풍습에 비춰볼 때 5살은 세상을 얕보거나 한번 마음먹으면 대열도 이탈하는 대범함과 고집스러움의 소유자들이다. 부모를 잃은 허탈함과 고독과 주체할 수 없는 아프리카에 대한 그리움, 문틈 사이로 봄바람을 타고 들어오는 자유에 대한 아득한 향수.
결국 세로는 굳게 닫힌 자신의 내부에 세워진 담장을 무너뜨리고, 동물원 우리를 쓰러뜨리고 자유를 찾아 동물원 바깥세상으로 탈출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세로가 만난 건 꿈꾸던 초원이 아니었다.
그는 차도의 중앙선을 밟으며 한 순간 질주의 기쁨을 맛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주택가 골목안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을 보자 잠시 길을 멈추어주는 배달 오토바이를 만나고, 탈출을 응원하는 동네 아이들을 만나고, 자신을 향해 마주 달려 나오다가 자신이 놀랄까봐 못 본 척 돌아서서, 아닌 척 뒷짐 지고 사라지는 아저씨도 만났다.
그 순간 얼룩말 세로는 이곳이야말로 자신과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또 다른 천국이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물론 나도 그랬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야말로 얼룩말과 함께 살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는 곳임을 그들을 보며 알았다. 그리고 가끔씩 얼룩말이나 캥거루, 기린, 코끼리 등이 동물원을 뛰쳐나와 주기를 바랐다.
그런 상황이 오면 나도 그들을 위해 가던 길을 양보할 수 있다. 그들이 길 위에 실례해 놓은 것이 있다면 그걸 거두어 텃밭에 거름으로 쓸 준비가 되어 있다.
<교차로신문> 2023년 4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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