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어느 날 풍선이 내려왔다

권영상 2023. 4. 12. 10:09

 

어느 날 풍선이 내려왔다

권영상

 

 

 

가을 어느 날이었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다.

하늘에서 뭔가가 둥둥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은 차츰 내려오더니 우리 집 마당에 사뿐 내려앉았다. 파란 풍선이었다. 나는 마당으로 나가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풍선을 집어 들었다.

풍선은 풍선인데 어린 시절에 불고 놀던 풍선보다는 약간 무게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누르면 감촉이 말랑말랑했다. 그렇다고 바람이 빠진 건 아니었다.

 

 

나는 풍선을 들고 풍선이 내려온 그 하늘을 올려다봤다.

풍선을 놓친 선녀들이 풍선을 찾으러 내려올 것 같은 깊고 푸른 하늘이었다. 보름달 뜨는 밤, 산중 폭포를 향해 날개옷을 날리며 한 무리의 선녀들이 내려온다는 그 멋진 풍경이 떠올랐다. 선녀들이 내려올 만큼 하늘은 푸르고 깨끗했지만 하늘에선 그 이후 별 소식이 없었다.

나는 풍선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바람 주입구 주둥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묶인 실에서 벗어난 풍선이 하늘로 날아올라갔다가 기압이나 기류의 영향으로 다시 내려온 모양이었다. 공중으로 던져 올려도 날아가지 못하고 다시 내려왔다.

풍선을 주웠다고, 어른이 돼 가지고 덥석 안고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염치없는 짓 같았다. 이웃에 풍선을 가지고 놀 아이가 있다거나 지나가는 아이 엄마임 즉한 분이라도 보이면 방금 하늘에서 내려온 풍선이라며 건넬 수 있겠지만 시골엔 그럴 만한 이들이 없다.

 

 

나는 과분하게 받은 선물을 들고 당황해 하는 어린 아이처럼 어색한 마음으로 이러 저리 거닐다가 마침 마땅한 데를 발견했다.

수돗가에 서 있는 메이플나무였다.

메이플 나뭇가지 사이에다 풍선을 끼워놓았다. 풍선 주인이 나타난다면 찾아내기 좋게, 만약에 풍선을 가지고 싶어 떼를 쓰는 아이가 혹 있다면 가져가기 쉬우라고 적당한 높이에다 끼워놓았다. 그리고는 누구 가져갈 사람 가져가라는 몸짓으로 돌아섰다.

저녁에 잠깐 보고 다음 날 아침에 나와 보아도 풍선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풍선은 메이플나무 가지에서 가을비를 맞고, 또 눈을 맞으며 겨울을 났다. 한데서 다섯 달을 났는데도 풍선은 처음 모습 그대로다.

 

 

요즘 들어 나는 가끔 풍선이 내려오던 그 하늘을 쳐다본다.

만일 하늘에서 동아줄이 스르르 내려온다면 이걸 어쩐다?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다. 조만간에 동아줄이 내려올 테니 잡을 건지 말 건지를 빨리 결정하라는 것처럼 싱겁게 걱정하는 나를 본다. 잡지 않으려니 지상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것 같아 내가 미련하게 느껴지고, 그렇다고 거기가 어떤 곳인 줄도 모르고 덥석 잡자니 그것 또한 바보스러워 보였다.

 

 

올라가면 언젠가는 내려올 수 있다는 조건을 나는 내게 제시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동아줄을 한번 잡아보고 싶었다.

그곳이 암만 힘들다 해도 우리가 사는 이곳만 할까. 이곳은 속도가 너무 빠르다. 늘 시간에 허덕인다. 오늘의 가치가 내일이면 휴지통으로 들어간다. 끝도 끝도 보이지 않는 욕망과 타인과의 경쟁이 있다. 코흘리개 아들에게 내가 살아가야할 인터넷의 길을 묻고 서툴게 찾아가는 곳이 이곳이다. 살아가기 너무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이들이 은밀히 많다. 회원 가입을 못 하면 당장 내 권리를 찾을 수 없는 데가 바로 여기다.

 

<교차로신문> 2023년 4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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