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그림
권영상
창고에서 꺼낸 등산배낭을 푼다.
그 안에 40여 년 전에 쓰던 내 그림도구들이 있다. 나는 폐광 속에 묻힌 불빛을 꺼내듯 내 오래된 청년을 꺼냈다. 이젤과 화구통과 20호짜리 캔버스 두 개가 나왔다.
꾹 닫힌 화구통을 열었다. 테레핀 오일 냄새와 함께 방금 짜다가 둔 것 같은 유화물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오랜 청년의 한 모퉁이 편린이다.
여기 앉아 그림을 그리면 좋겠구나!
다락방이 있는 집을 구하면서 나는 직장생활에 지친 나를 그렇게 달랬다.
그러나 그 후 10년을 흘려보내면서 나는 한 번도 캔버스 앞에 앉지 못했다. 시골은 시골대로 또 바빴다. 어디에 가 머물든 나는 바빴고, 그림은 늘 뒷전으로 밀려났다.
캔버스 앞에 앉는 일은 그림을 업으로 하는 화가가 아니면 실은 어렵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거리를 팽개치고 거기 눌러앉을 배짱이 없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거기서 밥이 나오고 술값이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옛날처럼 음악을 찾아 틀고, 이젤을 세우고, 캔버스를 올려놓고, 캔버스 밑에 화구통의 것들을 벌여놓았다. 그리고 모처럼 책상 위에 빈 꽃병을, 아직도 따라다니는 석고상을 올려놓고 손을 털었다. 오늘은 이것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일어섰다.
여기까지 오는데 꼬박 40년이 걸렸다.
그림을 만난 건 20대 중반 첫 직장에서였다. 내가 머무는 하숙집엔 동년배인 같은 학교 미술교사 s씨가 있었다. 나는 국어였고, 그는 대학생 시절 전국 미전에 얼굴을 알린 이었다. 글을 끄적이는 나와 그는 금방 가까워졌다.
나는 종종 그의 방에 쌓여있는 미술서적을 뒤적였고, 그가 붓을 놓으면 테레핀 오일 냄새 가득한 그의 방에서 술을 마셨다. 일요일이면 대체로 나는 술병을 들고, 그는 화구통을 메고 마을 골목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렇게 그의 어깨 너머로 유화라는 것을 배웠고, 그림 작업으로 혼자의 시간을 견뎌낼 즈음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고 말았다.
그가 떠나면서 나의 그림도 거기서 끝이 났다.
그후 직장을 멀리 옮겨간 도시에서 우연찮게 화실을 만났다. 나는 거기를 드나들며 크레파스화를 배웠고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때 나는 내가 그림보다 술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림을 작파했다. 그리고 자유롭던 나의 청년 시절과 결별한 후 결혼을 했다.
40여 년이 지난 올봄이다.
난데없이 국제전화 한 통을 받았다. 그였다. 내 손에 붓을 들려주던 미술교사 s였다. 모 문학지에 실린 내 글을 보고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그도 나처럼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청년이었고, 그 시절은 우리들의 뜨거운 봄날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직장이 우리들의 첫 직장이었으니까.
결국 그림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도 그림을 접은 지 오래 됐다고 했다.
“내 기억으론 그때 선생님 색채감이 좋았어.”
통화 중에 그가 그런 말을 내게 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말에서 아득히 잊혀진 테레핀 오일 냄새가 났다.
그의 말 때문이었을까. 술을 사랑하고, 그림을 사랑하고, 혼자의 시간을 즐기던 청년 시절의 뒤안길로 내 마음이 돌아가는 걸 느낀다.
<교차로신문> 2023년 5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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