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의 대화
권영상
대화는 늘 있다.
그러나 대화를 하고 돌아설 때면 허전하다. 이런 대화에 허덕일 때마다 나는 그대와의 대화를 기다린다. 그대와의 대화는 침묵으로 시작하지만 때로는 경건하다.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면 왠지 평온과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
우리가 늘 하는 대화란 그렇지 않은가. 분위기에 따라 마음에 없는 말을 해야 하고, 자신도 모르게 속 깊이 간직한 비밀을 바보처럼 꺼내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대화가 끝나고 나면 나는 나 자신의 말실수와 바보스러움을 후회한다.
“생각 없이 말했어. 그 말 못 들은 걸로 해줘.”
다음 날이면 대개 그런 전화로 대화의 찜찜하고 허전한 마무리를 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대와의 대화엔 그런 후유증이 없다. 그대는 내게 충직해 내가 발설한 비밀과 말실수에 언제나 침묵한다. 그런 면에서 그대는 나의 내밀한 대화 파트너이다.
나는 그대가 나를 만나러 오는 길을 안다. 물론 나도 그대가 오는 길을 안다. 우리는 서로 만나고 싶어 하는 시간도 안다. 나는 그대가 올 때쯤이면 일체의 모든 일을 마치거나 중단하고 그대를 맞으러 나간다. 마당가 늙은 감나무에 기대어 서거나 아니면 베란다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그대를 기다린다.
그대는 동쪽에 위치한 건너편 참나무 숲을 붉게 물들이며 온다. 참나무 숲 하늘이 우련히 물드는 것은 그대가 가까이 오고 있다는 신호다. 그대와의 만남은 역시 낮보다 청명한 밤이 좋다. 들판이나 언덕 위에서 여럿이 맞는 것도 좋지만 단 둘이 만날 때가 가장 좋다.
그대가 지금 저기 오고 있다.
이 순간, 참나무 숲이 잠시 흔들리고, 별들이 잠시 희미해진다. 그런 뒤로 그대는 반가운 얼굴을 내민다. 그대의 얼굴은 둥그렇고 붉다. 먼 길을 달음질쳐온 사람의 얼굴처럼 불콰하다. 나를 향해 달려온, 약간은 흥분에 들뜬 듯한 그대의 얼굴을 나는 좋아한다. 언제 보아도 그대는 건강하고 혈색이 좋다.
나는 그대를 만나면 ‘아!’ 하는 가벼운 비명과 함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대와 나는 그렇게 만난다. 나는 연실 아! 하는 감동과 찬사로 그대를 맞이한다. 그대는 이 밤, 그 어떤 것보다 더 밝으면서도 빛나거나 눈부시지 않은 얼굴로 다가와 내 곁에 앉는다.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서로 마주 보거나 또는 나란히 앉는 방식이다.
이 무렵의 대화는 주로 이 거대한 천체와의 격정적이거나 감동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다. 생명의 환희와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가 주류를 이루는 대화다. 그대와의 간절한 대화는 언제나 그대가 나보다 조금 높은 시선 위에 있을 때다. 주로 나는 그대를 쳐다보며 오늘 하루 나의 고민이나 내가 소원하는 바를 조용히 들려준다. 매일 반복되는 나의 이야기에도 그대는 지루해 하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언제나 귀 기울여 조용히 들어준다. 대체로 우리의 대화는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대는 내 이야기에 대한 답변을 내 마음에 전하고, 그 답변을 내가 찾아내게 하는 자문자답 식의 대화를 즐긴다. 그대는 늘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 안에 준다. 내가 어리석어 그 대답을 미처 찾지 못할 때도 있지만 나는 안다. 그대의 답변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한 번도 이 자문자답의 화법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없다.
조용한 저녁이거나 밤. 천체와 나누는 이 대화는 생의 또 다른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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