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 위의 카페
권영상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위층에서 누군가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했다. 나도 가끔 유튜브 음악을 들으면서 아래윗층분들의 조용한 시간을 방해할까봐 걱정했었다. 창문을 닫았다. 닫고 나자, 소음 같던 바이올린 소리가 오히려 질서를 잡으며 바르게 들린다.
‘저 여린 가지 사이로 혼자인 날 느낄 때 이렇게 아픈 그대 기억이 날까.’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다.
근데 들려오는 방향이 위층이 아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었다.
아, 그 집 옥상이다. 아파트 길 건너편 카페. 요 몇 달 전에 카페를 낸 그 카페 옥상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온다. 옥상엔 파라솔 그늘 아래 커피를 마시는 이들이 있었는데 파라솔이 사라지고 흰 천막이 여러 개 쳐져 있다. 재미있는 카페가 주택가에 들어섰다.
오늘은 여러 사람을 앞에 두고 누군가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길 건너지만 우리 집이 4층이라 또렷이 보인다. 줄무늬 티셔츠의 여자가 ‘내 사랑 내 곁에’를 켜고 있다. 초록 잔디 옥상과 그 위에 친 하얀 천막, 그리고 깨끗하게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과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카페는 처음부터 좀 독특했다. 옥상에서 그림책 판매도 하고, 바자도 하고, 얼핏 보아 팀 회의도 그 천막 그늘 아래서 하고, 때로는 소란하지 않은 음악도 틀었다.
‘힘겨운 날에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은 어디에.’
나도 모르게 ‘내 사랑 내 곁에’를 흥얼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좀 전의 풍경과 달리 가슴 한 구석이 텅 비어가는 듯 우울해졌다. 부를수록 노래에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는 며칠 비가 내렸다.
부안에 일이 있어, 예매한 버스를 타고 일찍 내려갔다.
무사히 일을 마치고 오후 7시쯤 서울에 돌아왔다. 무거운 걸음으로 아파트 후문에 들어설 때다. 그 카페 옥상에서 다시 음악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방을 든 채 그 카페에 들어섰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젊은 여자 분이 불빛을 받으며 플룻을 불고 있었다. 곡이 끝나자, 그녀가 박수를 받으며 인사를 했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다음 곡을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플룻에 입을 댔다.
점점 어두워가는 밤, 플룻에서 감미로운 곡이 흘러나왔다. 다들 귀를 기울였다. 귀에 익은 포레의 ‘시실리엔’이다. 6월 밤에 어울릴 듯한 곡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도시 속 카페, 카페 2층 옥상, 하얀 천막에 어룽대는 붉은 불빛과 낯설지만 마음이 따스해 보이는 사람들.
근처에 아파트가 있고, 주택들이 있다고 해도 전혀 그분들의 밤을 방해할 정도가 아닌 약간 슬프거나 외로움이 느껴지는 시실리엔은 밤의 불빛처럼 부드러웠다.
그녀의 연주가 끝나자, 우리는 박수를 치며 우우우,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런 소동도 이미 고요해질 대로 고요해진 밤의 정적 속으로 잔잔히 묻혀버렸다.
모여 앉은 이들의 연배와 나의 연배가 너무 차이가 났다. 나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곡을 들으며 옥상 계단을 내려왔다. 다 마신 커피잔을 카운터에 두고 카페를 걸어 나오는 내 몸이 가벼워진다. 부안까지 버스로 왕복 6시간. 낯선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온 피로가 포레의 시실리엔으로 말끔히 지워진다.
집에 들어와 카페의 옥상을 내려다본다. 별 하늘처럼 작은 점멸등들만 반짝이고 있다.
<교차로신문> 2023년 6월 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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