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좌표
권영상
아침 식사 후 동네 산에 올랐다.
이틀에 한 번씩 오르는 산인데 그 이틀이라는 시간이 때로는 헷갈린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산행이고 보니 어제 산에 올랐는지 아닌지 기억이 모호할 때가 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머리 감는 일 역시 그렇다. 어쩌면 정신 쏟는 일이 따로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의심하며 산마루까지 올랐다가 되짚어 돌아내려 올 때다.
잣나무 숲길에서 청설모를 만났다. 잣숲에서 청설모를 만나는 거야 신기할 게 없다. 잣이 익는 가을이 아니어도 잣숲에 청설모는 사시사철 눌러 산다. 그러니 청설모를 본다는 게 별반 놀라울 것도 없다. 청설모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겠다. 길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쯤이야 흔할 테니 청설모 역시 사람을 봐도 별로 대수롭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청설모는 내가 자신의 뒤쪽으로 난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해 통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잣숲 망개나무 곁에서 꽁지를 잔뜩 치켜세우고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러더니 뭔가를 묻고는 두 발로 꼭꼭 눌러 덮고 있었다.
내가 청설모에 관심을 가진 건 그의 그런 수상쩍은 행동 때문이었다.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청설모를 지켜보았다. 그건 잠깐 사이였다. 일을 마쳤는지 청설모가 잣나무를 타고 멀리 사라졌다. 나는 그가 묻어놓은 그 흙 속이 괜히 궁금해졌다. 청설모가 먹을 걸 여기저기 묻어둔다는 거야 알지만 무엇보다 그 작업 현장을 내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방금 묻어 놓고 간 뒤라 헤쳐 놓은 흙 표시가 완연했다. 청설모에게는 좀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망개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가만히 앉아 나무 조각으로 그 자리를 헤쳤다. 내가 본 그곳의 중심부가 아닌 주변, 그러니까 망개나무 뿌리 가까운 곳에서 뭔가가 나무 조각에 걸렸다. 알밤 하나가 불쑥 드러났다.
나는 아! 하고 놀랐다.
4,5센티 흙속에 숨겨진 밤 한 톨의 빨간 가을.
이 숲에서 보물을 찾아낸 것처럼 마음이 쿵쿵거렸다. 통통하고 말쑥한 알밤이었다. 청설모는 오늘 아침 운 좋게도 알밤 두 톨을 주웠을 테다. 그 중 한 톨은 아침식사로 쓰고, 남은 한 톨은 여기로 물고 와 저금해 놓고 갔을지 모르겠다.
어디선가 청설모가 지켜보고 있을 것 같아 알밤을 제자리에 꼭꼭 묻어주고 일어섰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잣나무들, 듬성듬성 서 있는 어린 고욤나무. 오리나무, 생강나무, 꽃 진 지 얼마 안 된 누리장나무가 서 있는 숲.
청설모는 그 중 이 망개나무 덩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끼니 걱정이 되는 어느 눈 내리는 날, 지나간 오랜 과거를 떠올리며 이 알밤으로 한 끼 식사를 때울 것이다. 나는 여기 이 자리에 서서 먼 훗날 이곳으로 다시 찾아올 청설모의 기억을 생각한다. 근데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그때까지 여기저기 숨겨놓을 밤과 도토리를 청설모는 어떻게 다 기억할까.
나는 쥐고 있던 나무 조각을 버리고 숲길을 따라 내려온다. 이 숲의 흙속에 청설모들의 알밤과 도토리가 저장되어 있을 걸 생각하니 보이지 않는 또 한 세계를 보게 되는 듯 잣나무 숲이 신비롭다. 지금 이 숲에 있는 모든 것들, 풀이든 잡목이든 누군가 무심코 차버린 돌멩이 하나까지 그것들은 모두 청설모에겐 기억의 좌표가 될지 모르겠다.
산을 오르거나 머리를 감는, 기껏 이틀 전의 기억조차 헷갈려하는 나를 알면 청설모가 웃겠다. 기억의 좌표가 될만한 소중한 일을 만들어 하루 하루를 명확히 구분지으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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