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나무가 쓰는 산문

나무 그늘을 밟아 돌아오다

권영상 2022. 8. 26. 15:58

 

나무 그늘을 밟아 돌아오다

권영상

 

 

치과에 들락거린지 오래 됐다.

이 나이에 거길 가는 이유야 뻔하다. 임플란트 때문이다. 가까이 있던 치과가 점점 멀어지더니 지금은 전철을 타야 하는 선릉역 주변에 가 있다.

늘 받는 치료지만 받을 때마다 그 고통이 아찔하다. 그럴 때면 음식을 먹는다는 일에 질릴 때가 많다. 치료가 끝나면 나는 그 얼얼한 턱을 감싸 쥐고 눈물을 쏟곤 한다. 오늘은 채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눈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햇빛에 어지럼증이 온다. 그런데도 또 무슨 나이답게 않은 오기가 발동했는지 전철역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집까지 걸어가 보자!’

전철로 가자면 세 역을 가 환승까지 해야 한다. 멀다면 걸어가기에 먼 길이다. 어지럼증에 살갗을 파고드는 늦여름 햇빛까지 빤히 보면서도 나는 객기다. 객기라 하지만 전혀 엉뚱한 데서 나오는 황당한 객기만은 아니다. 그때 내가 그런 판단을 한 데엔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푸르고 큼직한 그늘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저것 잴 것 없이 가로수 그늘에 성큼 들어섰다. 그늘길이란 그렇다. 들어서면 시원하지만 다음 그늘까지 뜨거운 햇빛 길을 건너야 한다.

 

 

8월 말 늦여름 더위는 극성스럽다면 극성스럽다. 봄눈 투정에 추위가 더 을쓰년스럽듯 초가을을 앞둔 늦여름 더위는 사람 몸을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나는 만용을 부리며 테헤란로를 걷는다. 오후 3시, 회색 도시의 폭양 밑을 걷는 일은 사막을 가는 것 같이 목마르다. 두 역쯤 지나자, 몸이 지치기 시작한다. 헛딛거나 신호등이 사람을 성가시게 한다.

내가 원해서 가는 길이지만 치과 진료 후유증도 있다.

나는 잠시 길옆 카페에 들렀다.

 

 

창가에 앉아 나무가 거느리고 있는 길고 넓은 그늘을 바라본다. 저것은 본디 나무의 그림자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상을 가진 것들은 모두 제 형상에 맞는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다. 빌딩이나 빌딩 앞에 세워진 조각 작품이나, 정류장 지붕이나 아니면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하늘을 나는 새들. 그들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처럼 그림자를 가진다. 물론 사람들조차.

그런데 나무만은 어떤가. 나무만은 그가 거느린 그림자를 우리는 그림자라 부르지 않는다. 꼭 그늘이라 부른다. 나무 그늘. 그 점에서 나무는 다른 것들과 분명 다르다.

 

 

아주 아주 오래 전이다. 성자를 닮은 나무 한 그루가 길 가에 서 있었다. 나무는 햇빛에 지친 몸으로 먼 길을 가는 나그네들을 물끄러미 내려다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때 나무는 지친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나무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그림자에 시원한 바람을 깃들게 하고, 지친 몸을 누이기 좋도록 편평한 자리를 만들어 마침내 제 그림자를 그늘이 되게 하였다. 그 후, 나무 밑을 지나는 나그네들은 그 그늘에 앉아 쉬었다가 다시 길을 갔다. 이 이야기는 길 위에서 사는 나그네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지금 나 역시 그 그늘을 밟으며 가고 있는 중이다.

 

 

너무 더워서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무는 나그네들이 감당해야 할 햇빛을 제 스스로 대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그들과 먼 길을 동행한다.

나는 카페에서 나와 이 도심에 서 있는 성자의 그늘을 밟으며 귀가한다. 치과에서 흘린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나무의 성스러움을 늦여름 길에서 다시 생각한다.

 

<교차로신문> 2022년 9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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