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리가 나는 거리
권영상
비 그친 저녁이다. 노을이 붉게 하늘을 덮는다.
갑자기 맥주가 생각난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다. 나이를 먹느라 내 몸이 느끼는 감정은 자연히 뒤로 밀렸다. 다가오는 현실만 보며 살았다. 술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까, 한때 그런 호기를 부렸는데 차츰 술과 멀리 떨어져 지낸다. 이러다가 술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 아닌 걱정을 할 때다. 그런데 오늘 그 감정이 돌아왔다.
나는 청바지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혼자 골목길을 걸어 카페 옆 맥주집에 들어설 때다. 길 건너 빌딩, 팍스 뮤직 음악원에서 피아노곡이 조용히 울려나온다. 가뇽이다. 나는 잠시 멈춘다. 피아노 소리가 노을에 묻혀가는 이 거리를 나직이 흔든다. 가끔 이 거리에서 만나는 피아노지만 오늘 따라 거리가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이국에 온 듯 나는 지나는 이들을 눈여겨본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빛깔과 헤어스타일을. 그리고 카페, 수학학원, 안과 병원이 있는 빌딩, 길 건너에 또 하나 있는 즐거운 맥주집 다우, 디월트, 새로 생긴 꽃집, 선물가게.
나는 그만 맥주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 아직 이른 저녁이라 가지런히 놓인 탁자들과 의자들과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외래 취향의 맥주잔들, 그리고 특유의 호프 냄새.
나는 테라스에 나가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이 붐비기 전까지 마실 요량으로 맥주 500cc를 시켰다. 며칠 전이라면 에어컨이 있는 실내를 찾았을 텐데, 비 그친 지금은 벌써 그때와 다르다. 8월이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가을이 느껴진다.
테라스 난간에 팔을 올리고 무연히 거리를 바라본다. 그때까지 머쓱하니 서 있던 상가의 저녁불이 켜진다. 거리가 새로 깨어나는 듯 불콰하다. 들어올 때에 잠깐 듣던 길 건너 음악원의 피아노곡이 다시 내게로 온다. 그것은 서쪽 편 하늘 어딘가에 지금 떠오르고 있을 저녁별처럼, 수면을 두드리는 빗방울처럼 맑게 나를 일깨운다.
평소 같으면 거리의 거친 소음 때문에, 아니 거친 폭염 때문에 몸이 몹시 지쳐 있을 텐데 오늘은 다르다. 귓가에 내려앉는 피아노 소리 때문인 듯하다. 굳이 귀 기울일 필요도 없는, 굳이 테마를 쫓아가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그것은 개울 길을 걷다가 어느 쯤에서 우연히 만나는 물소리 같다. 들으려 하면 들리는. 나무 잎사귀에 떨어지는 비의 속삭임 같이 사위를 고즈넉하게 한다. 내 눈에 빌딩들의 실루엣이 마치 피아노 소리 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듯 약간 기우뚱한 풍경이다.
몸 안으로 퍼져가는 맥주 탓만이 아니다.
이 술집이, 왁자지껄하던 이 길거리가, 더위에 지친 저녁시간의 불빛들이 피아노 소리에 고급스러워진다. 지난날의 좋은 감정을 기억하게 한다. 미등을 켜고 가는 차에 동승하여 별이 많이 뜨는 들판에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직장을 마친 젊은이들이 하나 둘 술집 안으로 들어선다. 맥주잔의 맥주도 시간이 흐르는 만큼 줄어들었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신 뒤, 힘들게 하루를 마치고 들어온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일어선다.
올 때에 걷던 그 골목길을 걸어 돌아온다.
피아노 소리가 천천히 걷는 나를 뒤따라온다. 오래 살아 친숙해진 이 골목길이 명상을 위한 숲길처럼 아늑하다.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그 동안 피아노 소리는 그 빌딩에서 잔잔하게 울려나왔다. 나는 오랫동안 그 빌딩 밑을 지나면서 뉴에이지의 신비롭거나 감미롭거나 잔잔한 분위기에 길들여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교차로신문> 2022년 8월 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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