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한 병
권영상
오랫동안 나가 있던 딸아이가 잠시 짬을 얻어 며칠 전에 귀국했다.
그래도 자식노릇 하느라 절약한 지갑을 털어 이것저것 선물을 사가지고 왔다.
“이거 설탕이나 첨가물을 넣지 않은 100프로 카카오 초콜릿이에요. 아빠 혼자 드세요.”
초콜릿의 본 고장, 벨기에산 초콜릿이라며 두 봉지를 넣어왔다.
나는 그 말이 기특해 선뜻 그러마, 하고 받았다.
그러고 나니, 떠오르는 이가 있다. 안성 옆집에 사는 수원집 아저씨다.
지난해 늦가을이다.
수원집에 그집 큰아들 며느리가 한 달 쯤 혼자 와 있었다. 큰아들은 우리나라 기업 중국 지사에 근무하는데 거기서 얻은 중국인 며느리라 했다. 한국말도 익히고 한국문화도 익히라고 혼자 두고 갔단다. 가끔 안성에 내려가면 수원집 식구들 말소리가 창을 넘어 들려왔다.
‘어머님, 진지 드시요’ 라든가 ‘우리 놀아가요’ . 그런 며느리 말을 바로 잡아 주느라 수원집 내외는 번갈아가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던 것이 어느 때부터 더는 그 재미난 며느리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는 눈 내리는 그해 연말이었다.
바깥에 인기척이 있어 내다보니 수원집 아저씨가 눈을 맞으며 문 앞에 서 있었다.
“조그마한 선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황급히 문을 열고 나간 내 앞에 그분은 들고 온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
아들이 제 아내를 데리러 오며 주고 간 보이차라 했다. 나는 얼른 감사인사를 드리고는 기껏 마트에서 사가지고 온 고구마빵을 내어드렸다.
집모퉁이를 돌아나가는 수원집 아저씨의 머리 위로 푸슬푸슬 눈이 내렸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손에 들려진 종이가방을 열었다.
거기엔 빨간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엔 금박지로 잘 싼 동그란 보이차 절편이 가득 들어 있었다.
오래 전, 운남성에 가 보이차 마시는 법을 배운 터라 몇 번 웃물을 우려낸 뒤 찻물을 잔에 따랐다. 냉기가 도는 방안에서 그 따스한 보이차를 마시며 선물 가방을 다시 들여다봤다. 빨간 뚜껑의 초콜릿병이 또 하나 있었다.
세상에나! 하며 나는 초콜릿병을 집어들었다.
색색깔 초콜릿이었다.
보이차야 기호식품이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초콜릿이라면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선물이다. 단것을 경계한다 해도 예쁜 초콜릿 유리병을 곁에 두고 멀리 가 있는 자식을 떠올릴 법도 할 테다. 그런데 그걸 내게 건네고 간 수원집 아저씨의 마음이 그 밤, 살갑게 느껴졌다.
그 후, 나는 수원집 아저씨의 살가운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그 색색의 초콜릿을 가끔 맛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정된 것, 끝내는 빈병만 남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중국에 가 있는 이 아들의 선물을, 내게 주려고 나를 찾아올 때의 그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마음을 잊을 수 없어 나는 지금도 내 책상 위에 그 빈병을 두고 있다.
딸아이가 내놓은 벨기에산 초콜릿을 앞에 두고 나는 수원집 아저씨 이야기를 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아내가 선뜻 썬크림을 내놓았다. 딸아이가 대학에서 만든 티셔츠를 내놓았다.
“작지만 딸아이가 가져온 초콜릿입니다.”
얼른 안성으로 내려가 수원집 아저씨에게 그 말을 하고 싶다.
<교차로신문> 2022년 8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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