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 호박꽃 피다
권영상
비 오는 아침,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호박꽃이 폈다. 호박밭 옆에 토마토 8포기를 심고 지주를 세워 주었는데, 호박순은 그 지주위의 햇빛이 탐나는지 짬만 나면 흘낏거렸다.
“에비다! 거긴 네가 오를 자리가 아니야.”
그렇게 타이르며 끌어내리지만 언제 보면 또 넝큼 올라가 있다.
오늘은 아예 그 노란 호박꽃을 피워 들고 있다. 호박꽃은 비 오는 것도 모르고 꽃을 피우고, 무심한 하늘은 호박꽃 피는 것도 모르고 궂은비를 내려 보낸다. 둘 다 나무랄 수 없다. 호박은 먼 가을 누렁호박을 생각하면 우중이어도 꽃을 피워야 하고, 하늘은 또 호박꽃 피는 걸 뻔히 보면서도 우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테니 모르는 척 비를 뿌리고, 호박은 또 모르는 척 꽃을 피우겠다.
토마토 지주 위에 떡 걸터앉아 꽃을 피우는 호박꽃이 멋스럽다.
멋이라면 이런 투박한 멋도 멋일 테고, 운치라면 이런 투박한 운치도 운치겠다. 그 넓적한 호박순 위로 투덕투덕 내리는 여름 빗소리에 시간이 더욱 느리게 간다.
지주대 위에 핀 호박꽃은 수꽃이다. 수꽃은 대체로 꽃자루가 길어 눈에 잘 띈다. 노란, 크고 소박한 꽃 안에는 수술 하나뿐 아무것도 없다. 저걸 보면 내 천성이 호박을 닮은 듯 하다. 정교하지 못하다. 인생을 장식할 줄 모른다. 그저 노란 그 한 가지 색깔로 수수하게 꽃 피운 것이 살갑지 못한 내 인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호박꽃댁 안으로 빗속을 날아온 호박벌 한 놈이 성큼 들어선다.
일부러 찾아온 손님인지, 비를 피해 들어서는 나그네인지, 뭐 이렇다 할 인기척도 없이 안으로 직행한다. 드나드는 것조차 별로 까다롭지 않다. 주인장을 부를 것도 없고, 내부로 들어가는 길이 교묘하지도 않다. 그러니 방문의 예의를 크게 차릴 것도 없다.
그 안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잠시 후, 호박벌이 돌아 나온다. 온몸이 노란 호박꽃가루 범벅이다. 검붉은 덩치가 들어가서 노란 금붙이 옷을 한 벌 바꾸어 입고 나오는 것처럼 꽃가루투성이다. 무엇보다 그 댁 주인장의 신신 당부를 받아가지고 나왔을 테니 비 좀 내리더라도 근방의 젊은 호박꽃 여인네를 찾아 꽃가루 정분을 전해야겠다.
나는 호박벌이 비 그늘로 붕 날아가는 걸 보고 일어섰다.
점심에 호박된장국을 해 먹기에 마침맞은 호박을 하나 따 놓아야겠다.
호박은 지난해에 잘 거두었다.
늙은 호박 열 개는 땄다. 그걸 차에 싣고 옛 직장 동료며 인근에 사는 지인들을 찾아가 반은 돌렸다. 우리도 호박 선물을 받아봤지만 선물 중에 복덩이 선물이 늙은 호박 선물이지 싶다.
늙은 호박을 거실 적당한 곳에서 놓아두고 겨울 한철 오며 가며 들여다보는 일은 즐겁다. 처음 수확할 적엔 단순히 누런 빛이지만 겨울이 깊어갈수록 누런 빛도 따라 깊어간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보석 중의 깊고 우아한 보석인 밀화 호박 빛으로 변한다. 부자가 된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부유하게 만드는 게 호박이다. 거기다 집안을 꾹 누르고 앉는 괜찮은 어른의 기품도 있다.
시작은 단순 소박한 노란 꽃으로 피지만 그가 거두는 결실은 대체로 만만치 않다. 겨울, 어느 눈 내리는 날 호박죽을 쑤어 먹어도 좋고, 호박 범벅을 해 먹어도 좋은 게 호박이다.
우산을 쓰고 나가 호박순을 헤치고 호박된장국에 알맞은 호박 하나 따들고 들어온다.
<교차로신문>2022년 8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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