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산
권영상
감자밭에 감자 순이 푸르다. 단촐하긴 해도 명색이 여섯 골이다. 심은 대로 쪽 고르게 났다. 봄 한 철 곱고 따뜻한 볕에 제법 그럴 듯 하게 감자밭이 어우러졌다. 안성에 내려올 때면 제일 먼저 내 눈 가는 곳이 푸른 감자밭이다.
마치 고향의 아버지나 되는 것처럼 내 마음을 든든하게 다잡아준다. 안성 일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면 불과 사나흘이 지났는데도 열흘이 지난 듯해 대충 먹을 것들을 싸들고 서둘러 내려온다. 그때도 나를 부르는 건 감자밭의 푸른 감자들이다.
퇴직 훗날을 기약하느라 준비한 텃밭이었다. 하지만 퇴직을 기다리지 못하고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 두었다. 감자를 심어 가꾸는 일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텃밭에 감자만 심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예전 아버지 하시던 대로 대파며 토마토, 고추, 호박, 강낭콩과 콩은 물론 채소도 가꾼다.
기후가 감자에 맞지 않아 그런지 안성엔 감자 심는 집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나는 내리 7년을 심었다. 작은형수님께서 감자씨를 대주셨고, 나는 그걸 받아 감자 고랑에 심으면 그만인 게 감자밭 가꾸는 일이다. 그 옛날의 고향 아버지처럼 긴 감자이랑을 타고 앉아 감자밭 김을 맬 일도 없고, 이랑 끝에 엉덩이를 털썩 내려놓고 아버지가 피시던 담배 한 대의 고단함도 있을 리 없다. 그런데도 감자밭을 들여다보면 그런 고단한 기억이 내게 전해진다.
아버지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제비가 돌아올 때쯤이면 나를 데리고 넓은 뒷버덩 감자밭 김을 매셨다. 큰형은 대처에 나가 살고, 작은형은 이미 분가를 한 뒤였다. 그랬으니 막내인 나는 연로한 아버지의 마지막 힘이 되어드릴 수밖에 없었다.
봄볕이 더운, 사래 긴 감자밭 골에 한번 앉으면 해가 지도록 아버지를 따라 종일 일했다. 그 무렵의 아버지란 지금의 아빠와 다르다.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긴 밤을 홀로 주무시는 엄한 분이셨고,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홀로 고민하는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와 너른 들판에, 그것도 단 둘이 감자밭 김을 맨다는 건 섬처럼 외로운 일이었다.
“해 길고 고랑은 먼데, 구름이 저 혼자 가는구나.”
아버지는 저만치 앞서 이랑을 타고 가시며 소리를 하시곤 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소리가 부끄러워 들판을 두리번거렸고, 아버지와 자꾸 거리를 두었다. 아버지의 소리가 날아가면 들판은 턱없이 고요했다. 아버지의 숨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로. 그럴 때에 저만치 홀로 가시는 아버지 뒷모습은 아지랑이처럼 외롭게 흔들렸다.
“감자철이면 작은형수님이 먹도록 감자를 보내주시는데, 감자는 힘들게 뭣 하러 심어?”
그런 말을 듣는 게 벌써 7년째다. 아내 말이 옳다. 작은형수님은 감자씨도 보내주시지만 감자 캐는 철이면 수확하신 감자도 적잖이 보내주신다. 그러니 텃밭에 감자 심을 까닭이 없다. 그런데 오늘이다. 감자 골에 아버지 하시듯 강낭콩을 심다가 그 까닭을 알았다. 별 소용에 닿지도 않는 감자를 심어 가꾸는 이 일이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신 유산임을.
맏이라는 이유로 큰형이 아버지 유산을 혼자 가져갈 때 작은형과 나는 서운했다. 아버지께서 저쪽 세상으로 가신지 35년.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이 하나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감자 심는 일이 그것이었다. 이 일은 아주 오랜 옛적, 아버지가 젊은 내게 일찌감치 물려주신 유산이었음을 오늘 알았다.
문득 그 옛날의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다.
“해 길고 고랑은 먼데 구름이 저 혼자 가는구나!”
나도 몰래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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